한줄 詩

여전히 그 잔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다 - 하상만

마루안 2022. 9. 19. 22:05

 

 

여전히 그 잔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다 - 하상만


왜 어떤 사람은 백 년을 살고
어떤 사람은 삼십 년을 못 사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함부로 살아도 다치지 않는데
어떤 사람은 조심해서 살아도 사고가 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하느님은 먼저 데려간다는데
그런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왜 어떤 사람은 몇 방울의 물방울도 미끌어지는가
바다를 헤엄쳐 건넜던 사람인데도

어떤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마음이 무너진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죽음 앞에서는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도가 소용없다

지은 죄도 없는데 고통스럽게 죽는 것은
모르는 죄가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군중의 살해자들은 왜 천년을 사는 걸까
아무런 고통도 없어 보인다

왜 어떤 사람은 떠나고 나서야 가슴에 남을까
일부러 찾아간 적도 없는데

미워한 사람인데 헤어지면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은 사랑하기라도 했을까

때가 되면 책들을 버리면서 밑줄 그은 책들을 주저한다
다시 읽어보면 밑줄의 이유를 알 수 없다

왜 이가 빠진 잔을 보면서도 버리지 못할까
그 잔은 여전히 나로 하여금 차를 마시게 한다

 

 

*시집/ 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걷는사람

 

 

 

 

 


잔 - 하상만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옆에 커피 잔이 놓여 있으면 덜 심심하다
아는 할머니 한 분은 헤이즐넛 커피를 해질녘 커피라고 한다

해질녘

그게 더 예뻐서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모르고 사는 삶이 더 아름답다
하늘에서 하얗게 내린 눈이
쌓여서 어떻게 푸른 빙하를 만들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세상을 신비롭게 만든다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면서

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삶을 사랑한다
영원히 궁금해 할 수 있는 삶

내게 모든 진실이 필요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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