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景 42

도심 뒷골목의 도반

시대가 변해서 요즘 탁발을 하는 스님은 없다. 어릴 적 탁발을 히는 스님이 동네에 오면 철부지 개구장이들은 스님을 놀렸다. 중중 까까중 동냥 하러 왔다네 뭐 이런 노래와 함께 스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놀렸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 일행 중 하나였다. 당시의 스님 심정은 어땠을까. 탁발을 하나의 수행으로 여기 듯이 개구장이들 놀림도 수행 과정에 포함 된다고 생각했을까. 눈물 많은 중년의 남자가 서울 도심 뒷골목에서 스님을 만났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걷는 모습이 참 좋았다. 저런 것을 도반이라 했던가. 지금도 나는 파르스름하게 깎은 스님의 머리를 보면 서늘함이 지나간다. 평범한 길을 포기하고 걷는 수행자의 길은 행복한가. 그렇게 믿는다. 저렇게 같은 길을 걷는 도반이 있으니까.

다섯 景 2019.01.28

기형도 문학관의 가을

경기도 광명에 있는 기형도 문학관을 갔다. 개관이 조금씩 미뤄지다 작년 말에 개관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아직 정리가 안 되어 조금 어수선했다. 시간에 쫓겨 개관을 했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난 이제야 자리를 잡은 모양새다. 한국 곳곳엔 수많은 문학관이 있다. 작은 사설 박물관, 각종 기념관 등을 합치면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잘 운영하느냐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있으나마나한 것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여행을 다니면서 틈틈히 지방의 기념관 등을 방문하는데 세금만 축내는 기념관이 많다. 기형도 시인은 인지도가 있는 시인이라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기념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재단이 많았으면 한다. 문제는 꾸준함이다. 내가 머문 두 시간..

다섯 景 2018.11.16

지붕에서 내려 온 가을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집을 만났다.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지만 대문을 열면 잠시 들어오라고 할 것 같은 집이다. 내 어머니가 살고 있다면 불러 보고 싶은 집이다. 점점 지붕이 있는 집이 사라지고 있는 세상이다. 어릴 적 어머니는 김장보다 더 큰 일이 지붕을 올리는 일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볏집으로 엮은 이엉으로 지붕을 덮는 일은 여자가 할 수 없다. 서른 아홉에 홀로 된 어머니는 이후 모든 일을 당신이 하지 못하면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평소 논일 밭일 등 품앗이로 품을 팔아 그 댓가로 우리집 지붕 공사를 동네 남자들이 했다. 한 번 하면 몇 년 가는 것이 아니라 매년 삭은 이엉을 걷어 내고 새로 올려야 했다. 입에 겨우 풀칠 하는 정도의 가난함을 벗기 위해 어머니는..

다섯 景 2018.10.09

허수아비는 어디에 있는가

어렸을 때 가을이면 들녘에는 어김 없이 허수아비가 세워졌다. 지푸라기로 만든 사람 모형에 헌 옷가지를 입고 모자를 쓴 허수아비가 대부분이었다. 허수아비 생김새는 각양각색이었다. 논 임자의 예술성도 엿볼 수 있는 특색 있는 허수아비였다. 때론 빈 깡통을 줄에 매달아 흔들기도 했다. 곡식을 지키려는 농부와 영악한 참새와 싸움은 가을 내내 계속 되었다. 이번 가을 들녘을 걸었다. 한창 익어가는 논에 참새들이 그냥 지나갈 리 만무하다. 올해도 농부와 참새의 줄다리기가 시작 되었다. 그런데 서 있는 허수아비는 없고 날아 다니는 새 모형이 대부분이다. 이곳만 그러는지는 다른 곳을 가 보지 않아 모르겠다. 시대에 따라 허수아비도 바뀐 모양이다. 시중에 파는 것을 사다가 달면 되니 간편하기는 하겠다. 가벼운 비닐 재질..

다섯 景 2018.10.05

코스모스가 있는 들녘

가을만 되면 미치는 성격이다. 어렸을 때부터 코스모스를 좋아했다. 아마도 스무 살 무렵에 코스모스가 내 성격과 무척 닮은 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코스모스를 만나면 벌떡 일어서거나 눈동자가 확 커진다. 코스모를 볼 때면 설렘과 서늘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꽃밭보다 들판에 있어야 더 어울리는 코스모스다. 오래 바라보고 싶은 꽃이다.

다섯 景 2018.10.03

가을을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

출근 시간에 쫓겨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한겨울에는 추위에 떨며 손을 비비거나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버스 정류장은 삶의 애환은 있어도 낭만은 없다. 요즘 도시의 버스는 어디쯤 오고 있는지 다 알고 기다린다. 이번 가을 몇 군데 시골을 여행했다. 명소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사는 농촌이다. 버스를 탔다. 하루에 몇 번밖에 없는 곳도 있고 매 시간 한 대씩 있는 곳도 있다. 드문드문 있는 버스지만 한적한 시골 길이라 밀리는 곳이 없어서 제 시간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오는 편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막연히 기다리는 경우는 없다. 설사 그런들 어떠리. 시골 버스 정류장은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다. 주변 풍경에 한눈을 팔다 그만 버스가 지나가 버리기도 했다. 가을이 오고 ..

다섯 景 2018.10.03

가을의 속도, 어디쯤 왔을까

요즘의 가을은 늦게 왔다가 빨리 간다. 9월 중순을 넘어도 한낮에는 완전 여름 날씨다. 늦더위 기세에 눌려 오기를 망설이던 가을은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잡을 것이다. 코스모스는 이미 가을 맞이 준비를 했다. 고추잠자리도 좋아라 춤을 준다. 늑장을 부리다 올 때는 더욱 속도를 빨리 내는 가을, 갈 때도 서둘러 떠난다. 그만큼 가을은 짧아졌다. 올 가을은 얼마의 속도로 오고 있는가. 가을은 길에서 온다. 코스모스 핀 들녘의 길을 따라 온다. 오길 망설이는 가을을 데리고 그런 길을 걸었다. 어제보다 해가 조금 짧아졌다.

다섯 景 2018.09.29

능소화가 핀 파란 대문집

이 꽃이 능소화라는 것은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릴 적 동네 중간쯤에 부잣집이 있었다. 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다. 농사와 집안 일을 거드는 부부가 바로 옆집에 살면서 그 집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안다. 아마 머슴 비슷한 거였을 것이다. 아픈 사람이 있어서 그 집 어머니는 굿을 자주 했다. 이따금 골목을 지나가다 창백한 얼굴에 수염 덥수룩한 젊은 남자를 볼 때가 있었다. 아프다는 그 집 아들이다. 그가 한동안 안 보일 때는 멀리 원정 치료를 위해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집에서는 자주 징소리가 들렸다. 밤이면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고함 소리와 부부 싸움 소리가 들여왔다. 아버지는 굿을 반대한다고 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집 아버지가 무서웠다. 호기심에 대문 앞을 얼쩡거리다 호통 소리에 혼비백..

다섯 景 2018.09.21

이화동 주민의 절규

대학로에 갔다가 부근에 있는 이화동을 갔다. 흔히 벽화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오래전에 삼선교에 친구가 살았는데 가끔 친구 집에서 잘 때가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낙산을 오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낙산공원이 많이 정비가 되었지만 당시는 무척 허름한 성곽이었다. 삼선교에서 성곽을 넘어 혜화동으로 내려 갈 때 이화동을 거쳤는데 서민들이 사는 달동네였다. 그 이화동이 느닷없이 관광 붐으로 유명세를 탔다. 문제는 원주민은 찬밥이고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돈 되는 일에 선한 규칙이 있을까. 장사하기 좋은 곳만을 사들인 외부인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다. 토박이 주민은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떠들썩 몰려다니며 불쑥 집안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고 사생활은 아무 보호를 받지 못..

다섯 景 2018.09.03

마네킹의 굴욕

아주 흐린 오후,, 벼룩시장이 열리는 중앙시장 부근을 갔다가 이색적인 물건을 발견했다. 딱 뭐를 사겠다는 마음은 없어도 산책 삼아 구경 삼아 이따금 가는 곳이다. 마네킹도 흥정을 위해 서 있다. 나는 이런 풍경에 마음이 간다. 집에 와서 사진을 보니 가격이 궁금하다. 분명 써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얼마였지?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가격을 매기다가 사진을 확대했다. 3만원,, 싸다. 가슴은 주인이 가려줬지만 혹시 홀딱 벋고 거리로 나선 저 마네킹은 굴욕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다섯 景 2018.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