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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혁명가의 농담 - 정덕재

늙은 혁명가의 농담 - 정덕재 2021년에 혁명가로 살기 위해서는 전동드릴 쯤은 자유자재로 다뤄야 한다 수많은 볼트와 나사로 고정된 것을 풀기 위해 혁명가는 숙련된 기술자여야 한다 이념과 열정으로 무장하기에 앞서 최신 장비로 무장해야 한다 콘크리트 벽에 못을 박다가 드릴의 무게 감당하지 못해 손목이 꺾였고 정형외과를 다닌 지 2주째 장기적인 치료를 위해 한의원에 다녀야 할지 거리의 간판을 살피는 나이 든 혁명가는 아무도 모르게 목공방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도 혁명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전동드릴을 자유롭게 다룰 때쯤 해답을 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손목과 발목과 이음새의 안부를 먼저 챙기는 게 혁명의 길에 나서는 첫 번째 태도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여론조사 2 - 정덕재 -벚꽃과 살..

한줄 詩 2022.04.07

재활용의 봄 - 이서화

재활용의 봄 - 이서화 장례식장에서 들려 나온 조화(弔花)가 다시 장례식장으로 실려 가고 목련도 해마다 조문을 다녀오는지 올해는 전년보다 꽃송이가 더 줄었다 3월 어디쯤에서 시들거나 빈자리를 골똘하게 골랐을 목련 꽃송이들 시든 꽃들을 뽑아내고 싱싱한 꽃들로 바꿔친, 어느 장례식장 목련실로 실려 갈 저 환한 봄 한 나무 아래에서 여러 번의 봄과 마주치듯 봄은 다만 꽃송이를 바꾸는 철인 것일까 뭐 어때, 한 그루 목련나무 아래서 몇 번의 고백을 바꿔치기하던 친구처럼 다시 봄을 끌고 온 목련 바꾸지 않으면 연애라는 말도 없다 장소와 풍경이 봄마다 연애하는 사이 장례식 꽃이 아름다워지는 시기가 되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마당 가의 꽃나무들 때문이다 두근거리는 봄은 늘 혼자가 아니고 숨어서 지켜보는 이별 때문이다 ..

한줄 詩 2022.04.07

별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 박두규

별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 박두규 밤이면 별을 올려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의 크고 작은 슬픔들이 올라가 자리 잡은 것들 내 오랜 슬픔은 어디쯤에서 빛나고 있을까. 북두칠성은 산 아래 숨어 기척도 없는데 은빛 윤슬 반짝이는 강가로 바람이 일고 나는 홀로 그대를 탐문하며 별빛 사이를 흐른다. 어둠 너머 고요 속 그대를 좇아가노라면 분노의 세상, 탐욕의 세월도 잊고 지독한 내 어리석음의 늪을 벗어날 수 있을까. 깊은 밤 텅 빈 시간 속 별을 바라보는 그대와의 하얀 밤이 있어 허튼 약속 하나 없이 강을 건널 수 있으리. 안개 피어오르는 강가를 걸으며 이승의 세월 켜켜이 쌓인 오래된 부고(訃告)를 모두 강물에 띄워 보냈다. 더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는 듯 강물은 두텁나무숲을 휘돌아 흐르고 *시집/ ..

한줄 詩 2022.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