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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은 봄날 저녁 - 김명기

괜찮지 않은 봄날 저녁 - 김명기 봄비 오는 줄 모르고 잤다 내리는지 몰랐던 비처럼 쏟아지는 잠 누군가 몸 한 귀퉁이를 잘라냈다는 말을 듣는데 온몸이 얼마나 아프던지 비명은 내 몫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읽던 책을 펼쳐 놓고 노트북도 켜 둔 채 시간 모를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 그녀에게서 사라졌다는 몸 한쪽으로 다시 돌아누웠다 수화기 너머 정비사가 낡은 찻값의 반이나 되는 수리비 견적을 말하며 깨끗하게 수리하면 괜찮을 거라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며칠째 떠돌이 개가 집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살피지만 괜찮지 않은 마음으로 모르는 척 피하고 있다 비 내리는 봄은 괜찮지 않은 것투성인데 괜찮다는 말을 입 속에서 혀처럼 달고 산다 한쪽을 잘라낸 몸과 찻값의 절반이나 되는 수리비와 굶주린..

한줄 詩 2022.04.05

후회의 목록 - 김화연

후회의 목록 - 김화연 내가 작성한 후회의 목록엔 왠 노인들이 이렇게나 많을까 발 빠른 나이를 먹는 노인들과는 달리 나는 늘 뒤늦은 나이가 드는 걸까 봄볕에 머리 감겨 드리지 않는 일 정든 가구를 버리라 했던 일 뾰족한 말의 끝을 살피지 않았던 일 늙은 집과 점점 멀어졌던 일 세상엔 묵음의 날짜로 지나가는 달력도 있어 후회는 무수한 동그라미로 표시되고 어쩌다 다정했던 기념일들이 드문드문 휴일 같을 때 나보다 더 멀리 간 노인을 따라가지 않고 자꾸 기다리라고 한 말 어느새 끝 쪽에 앉아있는 노인을 향해 왜 그런 위험한 곳에 앉아 있냐고 또 역정을 냈던 말 당신이 나의 후회 목록이라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리길 바랄 뿐 하나하나 후회를 살피다보면 그 많던 후회를 모아 두었던 노인들은 후회마저도 주섬주섬 싸가지고..

한줄 詩 2022.04.05

나비 박쥐 - 김남권

나비 박쥐 - 김남권 나는 나쁜 피를 빨아 먹는 박쥐다 어둠을 밥보다 좋아하고 어둠 속 불빛의 길에서 하이에나처럼 바람의 통로를 따라 움직인다 머물 곳이 없어 평생을 거꾸로 매달려 잠자리에 들고 거꾸로 매달려 눈을 씻었다 동굴보다 깊은 어둠 속에서 오직 허공을 날아오는 하나의 주파수만 찾았다 시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가슴속의 파동을 기억하는 그 사람의 등 뒤에 숨어서 숨소리만 들었다 솜털이 일어서는 오감을 열어놓고도 한 번도 그립다는 말을 못했다 반백 년을 넘게 비워논 하늘 아래서 한겨울에도 지지 않는 하얀 민들레꽃 한 송이로 피어나 서러운 눈물조차 삼켜야 했다 눈보라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동면에 들기 전, 심장이 잠시 멈추는 법을 배우고 옛사랑의 그림자를 베어 하얗게 솟구치는 그 피를 마시고 어둠 속을..

한줄 詩 2022.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