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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 - 우대식

닻 - 우대식 참 많은 문신을 보았지만 문신이란 오직 닻 하나 하급선원으로 떠돌았을 사내의 팔뚝에 겨우 매달린 그것, 끝내 정주할 수 없다는 예감으로 문신은 희미해진다 불 꺼진 항구에 수없이 닻을 내렸을 테지만 닳아빠진 그것을 슬그머니 건져 올리는 새벽 남쪽의 별들은 사내의 등을 내려다본다 닻 위에 별을 하나 그려놓아도 좋겠지만 그것은 지고지순이 아니다 저 지고지순은 언제쯤 희미해지는가 다 닳은 지고지순을 안고 한평생을 살아야 하는가 항구에 배를 댈 때 별의 슬픔과 닻의 슬픔이 슬픔을 참아가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지고이네르 지고지순 지고이네르의 지고지순 닻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봄날은 간다 - 우대식 허무의 절창 봄날은 간다 그렇게 사라져야지 꽃잎이 물에 떠서 사라지듯 알뜰한 당신이나 생..

한줄 詩 2022.04.30

가을, 겨울, 봄을 지나 여름으로 - 박찬호

가을, 겨울, 봄을 지나 여름으로 - 박찬호 행복한가 가을바람이 서늘한 물음을 보냈다 알고 묻는 것일까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어 잠시 멍하니 있는 내게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묻는다 혹시나 그리운가 창밖 흰 눈은 저리도 예쁜데 진즉 돌아왔어야 할 그이는 보이지 않고 되돌아보니 지난했던 그 한때를 두리번거리며 배회하는 나를 싸한 겨울바람은 시도 때도 없이 문득문득 몰려와 시린 내 귓볼을 때리며 묻는다 그래서 외로운가 때 이른 봄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다 내 발아래 멈춰서 진지하게 묻는다 나는 단지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뿐인데 내가 그리도 절박해 보였냐고 내게 네게 되묻는다 정말로 두려운가 여름 진한 햇볕 아래 잠시 묻어 두었던 외로움이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외로움은 종종 그리움..

한줄 詩 2022.04.30

봄밤 - 김정미

봄밤 - 김정미 까마귀 부리는 그날 운세였다 환풍기 날개 깊숙이 붉은 패를 밀어 넣고 아랑곳하지 않는 제발과 잠시 불타버렸다 불탄 순간은 홀로 어두워지다 얼룩을 남기며 깊어지는 중이었다 죽은 새를 죽은 패로 자꾸만 잘못 발음했다 비 맞은 날이면 점괘에 젖지 않는 오늘을 두꺼운 전집으로 갖고 싶었다 무너진 바닥을 믿지 않는 편이어서 고요한 모서리들은 손에서 미끄러지다 고딕의 자세를 놓치곤 했다 그을린 멈춘 새를 마지막까지 열지 않았다 퉁퉁 불은 손금을 물고 오는 부리를 오독할 때마다 뒤집어진 밑장 하나 본 것도 같다 검은 싸리나무를 건너오는 내 안에 나를 만날 때마다 검은 재가 자꾸 묻어 있었다 울면 아무래도 나쁜 패를 손에 쥐는 일이어서 조용하게 밥을 지었다 죽은 쥐를 끌고 가는 그림자를 보았다 나를 응..

한줄 詩 2022.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