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삶이 순하고 착해서 - 정채경

마루안 2022. 6. 8. 19:28

 

 

삶이 순하고 착해서 - 정채경

 

 

이모는 아기처럼 쌔근쌔근 잠을 잘 잔다
남편의 강짜에 눈 밑에 퍼렇게 그늘이 내려앉아도
사고로 남편을 보내고 주위에 떠밀려
소송을 준비하던 때도
절대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내비치지 않았다

남편을 땅에 묻고도 끄덕끄덕 잠은 오고
꼬르륵 주린 배는 밥을 달라 아우성이더라
때맞춰 밥 먹고 잠 한숨 자고 나면 다 살아지더라고

나이 서른다섯에 혼자되어 자식 셋을 키울 때
팔자 고칠 뻔한 남자가 있었다
끼니를 거르고 남자를 경계하는 
자식들의 불안한 눈빛 때문에
돌부리 자갈길을 몇 날 며칠 터벅터벅 혼자 걸었다고 

이제 편히 모신다며 요양원을 알아보느라 분주한 아들
자식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이모는 더없이 행복하다

결혼하는 손자에게 자신의 집까지 내어 주고
그저 잘 먹고 한잠 자고 나면 말갛게 웃어 주는
백지 같은 아기가 되어 

방금 전 약을 먹고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40년 전 폭풍이 몰아치던 때의 기억은 생생하여
순하게 잠든 몸과 움푹 패인 착한 눈동자

자꾸 움찔거리는데

이불을 덮어 주듯 목화솜 같은 봄눈이 내린다

 

 

*시집/ 별일 없다고 대답했다/ 문학들

 

 

 

 

 

 

그 후 - 정채경

 

 

신의 뜻에 거역했을까

신의 뜻에 따라 부름을 받아 떠났을까?

당신이 외롭게 가고 난 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오지 못했다

당신이 간 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전기료, 수도료, 가스비가 우편함에 쌓여

다급한 누군가 당신의 현관을 두드리면

그때서야 당신의 죽음은 문밖으로 흘러나올 것이다

 

비밀스러웠던 시간만큼 넘쳐나는 벌레들이 당신 곁을 맴돌고

건강했던 몸에서 흘러나온 슬픔이

바닥과 벽에 깊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역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쏠 것이다

 

버킷 리스트가 벽지와 함께 떨어지고

당신이 끝까지 대화를 시도했던 세탁기를 밖으로 끌어 내고

콘크리트 사방에 분무기로 화학 약품을 뿌려대며

고독했던 당신의 흔적을 지운다

 

왜! 내 집이냐고 길길이 뛰는 주인아주머니

문을 열고 나오려던 특수청소부*가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문을 닫고 숨죽여 기다린다

 

초라한 유품들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냄새를 뿜어 올리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돈 벌려고 하는 일이라며

그들은 말한다 이 일은 망할 수가 없다고

 

 

*고독한 죽음의 현장을 정리하는 청소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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