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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비를 맞다 - 변홍철

나무와 함께 비를 맞다 - 변홍철 너는 한때 행복했던 왕자의 동상처럼 황금의 깃 다 떨구고 섰구나 그러나 오늘 우리 발등에 쌓이는 것은 거름이 되지 못하는 슬픔 그리하여 바닥에 들러붙은 모멸 무거운 청구서와 마지막 달력 서글퍼라 곱은 손가락으로는 집을 수 없는 실마리여 허리 굽혀 더듬어보아도 폐선의 간이역에 뒹구는 도산한 노을 왕국의 채권들뿐 돌아갈 차표 한 장 살 수 없다고 찬비는 내린다 *시집/ 이파리 같은 새말 하나/ 삼창 비 오는 날 - 변홍철 라면 하나에 국수사리 한 줌 더해 끓인다. 콩나물 넣고, 고춧가루도 넉넉히 풀었다. 마당에 감꼭지 다 떨어지고, 모과나무는 수두를 앓듯 이파리 죄 병들었다. 반주로 소주. 어머니 한 잔, 나는 석 잔. 단오 무렵, 어머니는 팔순을 맞는다. 조금 퍼진 것을 ..

한줄 詩 2022.07.06

다시 데뷔전 - 전대호

다시 데뷔전 - 전대호 늙음의 물매 가팔라진다. 지붕 위에 물방울이라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겠네. 후회가 있다면, 젖 뗄 때 아기여서 그 허전함 새겨두지 못한 것, 데뷔전 때 풋내기답게 얼어서 그 설렘 누리지 못한 것, 헤어질 때 술에 절어있어서 그 아픔 만끽하지 못한 것. 그래도 소꿉장난은 아니었으니, 쏟아붓는 장맛비야, 마땅히 네가 날 격려해야 하지 않겠니? 지붕 위에 물방울들아, 올림픽이 연기된 것은 얼마나 다행이냐! 머잖아 또 온다, 장난이 아닌 승부. 두근거리자, 다시 데뷔전이다. *시집/ 지천명의 시간/ 글방과책방 나사렛 6 - 전대호 왜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지 알아? 고귀해서가 아냐, 끔찍한 동물이어서야! 묶어놓고 때릴 줄도 알거든. 내가 묶일지, 네가 묶일지 아무도 몰라. 오히려 링이 ..

한줄 詩 2022.07.05

여름산 - 이기철

여름산 - 이기철 골짜기를 잠가 버리면 구름은 어디로 흐를 거냐며 뻐꾹새가 운다 철쭉이 너무 붉으면 산이 불타 버릴까 봐 소쩍새가 운다 개울물이 내려오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은 여름 볕이 눈부셔 어린 토끼가 길을 잃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너무 조용하면 산이 강을 만나러 가 버릴까 봐 꿩의 목이 쉬고 그 소리에 낮잠 깬 도라지꽃이 보라색 저고리를 갈아입는다 아침 안개 산으로 올라가는 소릴 들으려고 노루가 장독 깨지는 소리로 운다 언제 오면 가장 반갑겠냐며 오동나무 아래서 라일락이 진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날이면 내가 손에 쥔 유리잔을 떨어뜨려 깬다 이것이 모두 여름날 정오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더 있지만 이만 쓴다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7월 - 이기철 채송화가 혼자 무럭무럭 발전하고 ..

한줄 詩 2022.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