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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한 여름 - 강시현

통속한 여름 - 강시현 여름이란 세상에 널리 통하는 풍속이나 습속이어서 아름답다 햇살의 커튼이 처마를 걷어 올리는 만삭의 아스팔트 내음, 도시의 과육은 통속종합병원의 정성 어린 진단과 처방에도 물먹은 자두처럼 짓물러 갔다 도시의 처진 눈은 어디쯤에서 만난 통속을 끌어안고 한눈을 팔기도 했고 박꽃에 달빛 쏟아져 자작나무가 하얗게 취한 길을 끌고 오던 밤, 쓰린 공복(空腹)의 숲을 걸을 때 여름은, 햇살을 삼킨 거대한 입으로 연신 하품을 뱉고 통속의 단단한 경계 안에서는 살은 뼈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욱신거리는 빌라촌 불빛에 발이 걸린 별의 군락지가 기우뚱하는데 그 틈으로 여름의 치마 속을 힘끔거리는 축축한 눈초리들 널리 통하는 습속은 그런 것인가 털어놓자면, 통속을 처음 만난 것은 시외버스 차창에서..

한줄 詩 2022.07.10

나에게 - 박용하

나에게 - 박용하 그림자하고 있어도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 표정 관리하고 있어도 욕보인 것은 욕보인 것 하루도 잊지 않고 죽음이 다가오듯이 하루도 잊지 않고 죽음에 다가가듯이 말과 글이 일생을 따라다닌다 그날 밤 사소한 태도 하나조차도 따라다닌다 증오는 녹슬지 않고 복수는 용서보다 힘이 세고 일생을 걸어도 바뀌지 않을 나와 일생을 걸고 바꿔가야 할 내가 식탁과 침대를 오가고 햇빛과 달빛을 오간다 내가 죽어야 바뀔 내가 어김없이 오늘도 죽어가고 죽어가기 전에 살아가고 죽을 때까지 살아남아야 하고 정치와 사회를 오가고 사물 같은 사람들 사이를 횡단한다 하루도 잊지 않고 풍경은 내 편이 아니고 자연은 누구의 편이 아니고 내 양심은 혼자 있어도 나를 찌르고 내 생각을 바꿔 놓는 타인들과 내가 바꿀 수 없는 ..

한줄 詩 2022.07.09

여름, 희다 - 강문숙

여름, 희다 - 강문숙 여름에 내리는 비는 희다, 아프다 발등 찍힌 채 칭칭, 하얀 붕대를 감고 절룩이며 걷다가 홀연히 돌아보면 온통 진창이다 몇 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이들이 사라졌다 다시 기억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단애의 시간들 흰 그늘의 슬픔이 짙어진 오후 세 시쯤 쏟아지는 눈물 속으로 내 뼈는 하얗게 부서지고 하늘은 한쪽으로 희뿌연 빗살을 뿌리며 기울어질 듯하다가 우레를 숨긴 채, 곧 제자리에서 눈꺼풀만 겨우 닫는다 누군가 입을 열어 말을 붙인다면 줄줄 흰색으로 흘러나와 순식간에 나를 에워쌀 것 같은 저 빗줄기의 감옥 나는 기꺼이 최선을 다해 미쳐 갈 것이다 그 흰빛에 갇혀 종일 반복 재생하는 음악처럼 칠월 장맛비는 마디가 없다, 길다 *시집/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천년의시작 꽃의 슬하 -..

한줄 詩 2022.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