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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밤 백석의 시를 생각하며 - 김상욱

스물이 훨씬 넘도록 내가 아는 시인은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이 전부였다. 읽은 시라고는 윤동주와 한용운, 서정주의 시였다. 군대에서 만난 선배 덕에 시인의 영역이 넓어졌다. 그때 선배가 읽던 황동규, 오규원, 황지우 시집을 처음 접했다. 감동은 별로 없었다. 그냥 스스로 잘난 맛에 사는 시인들의 지적 허영심 정도로 읽었다. 그 선임과 나는 성격은 이질적이나 어딘가 맞는 구석이 있었던지 늘 보초도 같이 서면서 곧잘 어울렸다. 진중하지 못하고 팔랑개비처럼 가벼운 나에 비해 그는 가슴 속에 돌덩이 하나 담고 있는 듯 언제나 고뇌에 찬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그때 감염된 시 바이러스가 지금의 시 읽기에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하다. 당시에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였던 시였지만 내 몸 어디쯤에 숙주로 남아 있다 훗날..

네줄 冊 2021.02.21

사랑의 뒷면 - 정현우

사랑의 뒷면 - 정현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외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컬러풀 - 정현우 옥상 문을 걸어 잠그고 밥을 먹었다. 멸치의 눈이 친구의 눈빛 같았다. 땅거미가 사람들을 갉아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투명한 가윗날 소리, 노을 ..

한줄 詩 2021.02.21

정처(定處) - 정일남

정처(定處) - 정일남 내가 없으면 나를 에워싼 만물은 의미가 없다 내가 있을 때 꽃은 피고 과일은 익어 굴러온다 나비는 날아와 어깨에 앉는다 나를 에워싸고 말을 걸어오던 부지기수들 나와 관계를 끊고 사계(四季) 밖으로 갈 것이다 미세물질은 허파를 갉아먹는다 몸의 반은 이미 흙으로 읽히고 두뇌의 반은 해골로 읽힌 지 오래 봉분에 바람꽃이 피어 손짓하게 되면 만 리 밖에서 무덤새는 날아와 꽃그늘에서 졸다 갈 것이다 마음속엔 동혈에서 흘러온 강물이 혼탁한 도시를 가로질러 간문(間門)을 흘러가게 될 것이다 *시집/ 밤에 우는 새/ 계간문예 무진 일기​ 1 - 정일남 문득 삼십 년 전으로 올라가 본다 민중시를 반 지하방에 엎드려 읽다가 어느 필화 사건에 휘말린 서정 시인이 아내가 떠나고 폐인이 되었다는 뉴스 홀..

한줄 詩 2021.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