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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 신표균

슬프게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 신표균 사춘기를 앓기에는 봄날의 보폭이 너무 짧아 삼월이 종종걸음 친 다음에야 깨우쳤습니다 자목련 큰언니 부풀어 오른 암꽃이삭 버들강아지 칭얼대는 옹알이 듣고서야 브래지어 뽕 터진다는 것 삼월이 꼬리 감추려 할 즈음에야 눈치챘습니다 매화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봄꽃 네 자매 홍역 같기도 하고 황달 같기도 한 젖몸살 돌림병 앓는 줄 삼월이 그림자 거둘 무렵에야 깨달았습니다 겨울 궁전에서 동상 견딘 얼음 공주 언 손 봄볕 쬘 사이도 없이 자매들 초경 앓는 신음 견디다 못해 알몸 분신공양, 봄을 익히고 있습니다 어린 처녀 연달래 시집갈 나이 진달래 혼기 놓친 난달래 무덤가 맴돌다 미쳐버린 금달래 슬피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진달래 그렇게 참꽃이 되었습니다 *시집/ 일곱 번씩 일곱 ..

한줄 詩 2021.03.29

몽골 소년의 눈물 - 안상학

몽골 소년의 눈물 - 안상학 염소가 풀을 뽑아 먹는 동안 사막은 저도 모르게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더 막막해져 가는 사막에서도 지금 여기 없는 꿈이 지금 여기 있는 아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사막의 한 줌 낙타 똥 같은 어느 마을 할아비 밑에서 자라는 어미 아비 없는 소년을 만났다 할아비는 사위 집에 손자를 맡기고 떠났다, 멀어지는 트럭 발을 동동 구르며 마구 허공을 할퀴던 조막손 소년은 마을 어귀 모래언덕까지 올라가 한참을 바라고 서 있었다 몽골은 눈물이 드물다는데 소년의 눈물 광막한 곳에서는 헤어지는 시간도 길었다 지금 여기 없는 꿈이 지금 여기 있는 아픔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몽골식 이별을 보면서 양고기칼국수를 먹으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여태 만나 온 삶의 아픔과 그래도 살게끔 한 꿈..

한줄 詩 2021.03.29

아버지의 꽃 - 이서린

아버지의 꽃 - 이서린 어시장 왁자한 어물전마다 커다란 고무 통 찬물에 잠긴 다발다발 무수한 주홍빛 돌기 봄이다 어린 딸들은 마루 끝에 앉아 햇볕을 받고 어머닌 수돗가에서 멍게를 손질하였고 맨드라미 꽃씨를 심는 아버지의 손목에 선명한 힘줄 가장의 의지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작은 술상이 차려지고 아버지는 손을 비볐다 맛있는 것을 앞에 둔 아버지의 버릇, 햇빛에 반짝이는 술잔 알싸한 멍게향이 일요일 오후에 스몄다 딸 셋을 나란히 앉혀 놓고 붉은 낯빛의 아버지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선창을 불렀고 음치에 가까운 어머니의 봄날은 간다가 이어졌다 얘들아, 아버진 말이다 봄이 오면 멍게가 단연 좋더라 이 바다 냄새가 참 좋더라 바다에서 피는 꽃 같지 않냐 초장에 찍은 멍게를 먹이려는 아버지와 한사코 싫다는 딸들의 실랑이..

한줄 詩 2021.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