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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사는 법 - 김선향

그녀가 사는 법 - 김선향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아주 오래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거대한 악어 한 마리 방을 독차지한 그랜드피아노 그녀는 싱크대 앞에 요를 깔고 모로 눕는다 애인의 뺨을 어루만지듯 피아노를 보며 어렴풋이 웃는다 그녀가 유일하게 웃는 때 피붙이 대신 피아노 고양이 대신 피아노 피아노는 그녀의 마지막 허영 끼니를 거르더라도 내다 팔 수는 없지 손가락을 빨면 그뿐 피가 마르고 뼈가 녹아도 피아노는 안식 피아노는 구원 그녀를 피아노에 묶어 난바다로 떠밀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곧 눈을 감겠지 *시집/ F등급 영화/ 삶창 구체관절인형 - 김선향 아이가 운다 사금파리처럼 텔레비전 빛이 새어 나오는 어두운 방에서 홀로 친구들은 다 갖고 있는 구체관절인형이 자기만 없다고 운다 야, 이년아 그 돈이..

한줄 詩 2021.03.30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 심너울

심너울의 소설은 늘 먼 미래를 이야기한다. 아니 먼 미래라 할 것도 없겠다. 서울 올림픽이 33년 전에 열렸듯이 지금부터 33년 후 정도의 미래다. 예전의 10년과 지금의 10년은 변화 속도가 다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긴 해도 50년 전만 해도 10년 세월에 지금처럼 변화가 빠르지는 않았다. 예전에 지금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 세상이 올 줄 알았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그러나 근 미래에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고 자율주행차가 거리를 접수할 거라는 것쯤은 예상을 한다. 심너울 소설에서도 여러 곳에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나온다. 인구가 줄어 들어 딱 한 명의 학생이 있는 초등학교가 있다. 한 명의 학생을 위해 교사 두 명, 조리사 한 명, 학교 관리인까지 4명이 근무한다. 4학년인 이 학생..

네줄 冊 2021.03.29

발라드의 끝 - 황동규

발라드의 끝 - 황동규 개나리 필 무렵 성했던 눈마저 황반변성 안구주사 맞기 시작했다. 앞으론 확대경 없이 신문 읽을 생각 말게! 안됐다는 듯 서달산이 아지랑이 피워 올리고 노랗고 하얗고 빨간 꽃들을 꾸역꾸역 뱉어낸다. 아지랑이 자욱이 오르는 오솔길이 한때 마음 되게 빼앗겼던 발라드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난 삶의 반절은 괜히 바쁘게 살았다. 우연히 들어보니 가뿐한 호박. 나머지 반도 볼 것 못 볼 것 미리 가리지 않고 제대로 살았던가? 봄이 몸살 톡톡히 앓고 있는 곳, 오솔길 구비를 돌자 눈이 밝아진다. 아지랑이 속에서 하양 노랑 나비들이 화들짝 날아오른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세필(細筆) 춤사위들이 시각(視覺)을 춤추게 한다. 눈높이가 여직 이토록 눈부실 줄이야! 발라드는 끝머리에서 삶을 가볍게 ..

한줄 詩 2021.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