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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석미화

가족 - 석미화 검은 산 아래 귀신집 살림살이라고 누가 써놓고 갔다 봄날, 귀신같은 사람들하고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일 언제 떠난다고 했지 뜨거운 냄비를 상 위에 올려두면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혔다 술병이 쌓인 만큼 돌아갈 길은 더 멀어졌다 바깥만 바라보는 일에 반쯤 혼이 나간 여자는 가족은 그러면 안 되지, 중얼거렸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참, 그렇지 비 오는 날에는 맑게 앉아서 앞으로의 거처들을 말했다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점차 거세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해야 할 말보다 하고 싶은 말만 쌓여갔다 검은 산에 불타는 얼굴이 겹쳐 보이고 천장에서 거미가 내려오고 밤에 보는 거미는 불길하다며 서로를 몰아세웠다 그래도 여기 살 만하지 비가 그치면 이만한 데가 없지 분명 누가 돌아보았는데 다..

한줄 詩 2021.05.02

모르는 사이에 - 김점용

모르는 사이에 - 김점용 나는 왼쪽 엉덩이가 없어요 그래서 걸을 때 몹시 절어요 절룩절룩 다리가 바람인형 팔처럼 멋대로 움직이죠 그가 언제 떠났는지 정확히 몰라요 긴 수술 후에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사라지고 없었어요 왼쪽 엉덩이를 무척 사랑한 애인이 가져갔는지 몰라요 애인도 엉덩이도 연락이 되지 않아요 언제쯤 돌아올까요 늦더라도 오긴 할지 어쩌면 영영 안 올 수도 있겠죠 의사 선생님은 끝까지 희망을 가지라지만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벌써 삼 년이 다 돼 가는 걸요 모르는 사이에 꽃이 피고 아이들이 자라듯 오늘은 저도 모르는 새 비가 왔네요 비가 오고 또 무엇이 올지 몰라 바깥에 놓인 의자를 조금 기울였어요 의자 왼쪽에 고인 물이 가만히 흘러내렸어요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

한줄 詩 2021.05.02

시간은 마디를 가졌다 - 오두섭

시간은 마디를 가졌다 - 오두섭 뚝뚝 잘려지는 마디가 몸 어디에 붙어 있는 게 분명하다. 시간은, 날개를 달았을 뿐인데 그 날개인 듯 창문을 뚫은 햇빛을 타고 들어와 내 앞에 툭 떨어진 벌레 한 마리 파르르, 불시착의 날개를 접고는 꿈쩍 않는다. 등딱지가 꽤 무거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개의 팔다리와 무척이나 민감한 촉수, 숨 가쁜 핏줄들 하지만 후진하는 날개는 없는 낌새다. 불현듯 내려다보니, 햇빛의 울타리가 아까보다는 조금 좁혀진 듯하다. 내 쪽에서는, 분명 차 한 잔 데워질 무렵 저 벌레는 아직껏 햇빛 위에 그대로다. 내가 못 본 사이 몇 걸음 걸어갔던 것, 햇빛을 따라갔거나, 아니면 피해갔거나, 자기 생의 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을 시간 내가 졸음에서 다시 책갈피를 여는 오후 2시쯤 *시집..

한줄 詩 2021.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