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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척점의 당신, 나무 - 최준

대척점의 당신, 나무 - 최준 나는 나를 번역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나는 당신의 중얼거림 밖에서 살아왔으니 의자로, 기둥으로, 불을 품은 육체로 다음 세대에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이념으로 무장한 적 있으니 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아직도 태양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네 가슴에 드리운 두꺼운 그늘을 뛰어넘으면 밝음이 오리라 기대하며 살지 다만 나는 나였을 뿐 당신이 아니었으니 당신이 아니었던 게 나의 잘못이라면 별은 무엇이고 달은 무엇인가 당신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순간 아는가 당신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내 속의 얼굴이 당신의 나이테로 불리는 주름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낮과 밤을 나누어 살아가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오늘도 내가 아니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디아스..

한줄 詩 2021.05.12

멀리 있는 빛 - 이산하

멀리 있는 빛 - 이산하 ​ 친구가 감옥에 박경리의 대하소설 한 질을 보냈다. 책을 전부 바닥에 펼쳐놓자 작은 독방이 토지로 변했다. 난 그 광활한 토지에 씨앗 대신 나를 뿌리며 장례식을 치렀다. 대학시절 시인지망생이었던 그에게 난 박상륭의 소설 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연쇄살인 뒤 나무 위에서 자진하는 주인공의 최후를 보며 그 도저한 비장미에 우리는 실성한 것처럼 얼마나 압도되었던가. '한라산 필화사건' 수배 때도 인터뷰로 여러 번 은밀히 만났다. 내가 석방되자 '시운동' 동인들의 '이륭 석방환영회'에서 그가 축가로 김영동의 노래 을 불렀다. 어둠은 가까이 있고 빛은 멀리 있는 처연한 노래였다. 깊은 강 같은 노래의 행간이 진짜 노래였다. 29살 그의 눈빛은 심야극장에서 어둠보다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한줄 詩 2021.05.12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백애송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백애송 출생지가 불분명한 일렬로 늘어선 근조 화환 제 무게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한다 환한 불빛 아래 잿빛 그림자들 돌아가는 술잔은 채워지지 않고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로의 말에 서툴기 때문에 가만히 한쪽 날개를 토닥일 뿐 날아갈 수 없는 무게만 가슴 한편 차곡차곡 쌓인다 생활이 지나간 자리에 어려풋이 남은 자국은 희미했다 당신이 없어도 고구마 줄기는 서로 엮여 자라고 푸성귀는 무성해질 것이다 다른 한쪽 날개가 파드득거렸다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걷는사람 미니멀리즘 - 백애송 목록을 작성한다 버려야 할 것들은 어제의 마음가짐과 오늘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한 잎이었다가 두 잎이 된다 다시 오는 봄엔 손잡고 모래 위를 걷자고 했던 일 서류봉투의..

한줄 詩 2021.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