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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 이용호

환절기 - 이용호 한때 당당하던 그의 지문은 간 데가 없다 슬그머니 개인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손가락의 무늬를 그리워하다가 새벽 첫 버스를 놓쳤다 마지막 회를 향해 가는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인력 소개소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새벽 추위에 떨고 있던 개 한 마리 시선이 그와 마주치자 맹렬하게도 짖어댄다 아침부터 소주잔이 급속하게 이동한다 아픈 만큼 마시는 건지 마셔서 아픈 건지 모를 사람들이 피워 놓은 장작불 속에서 서로를 외면하던 눈동자들이 서럽게 울어 대기 시작한다 주민등록증을 건네고 하루를 저당 잡히는 그의 한숨 소리가 사무소 계단에 쌓여 갔다 여기저기 떨어진 단풍잎들은 저마다의 하루를 계산해 본다 그도 이번 생에 이루지 못한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다가 다음 생에서는 어떤 목록을 가진 이파리로 나무..

한줄 詩 2021.05.26

내가 앉았던 자리에 대한 예의 - 최세라

내가 앉았던 자리에 대한 예의 - 최세라 플라스틱 의자 네 개가 무릎을 붙이고 앉아 국화꽃 화분을 내려다 본다 오월이라서 무성한 잎사귀만 있고 아치형 철제기둥엔 녹꽃이 너댓 무더기 피어있다 아무것도 미동하지 않았다 수면은 손바닥으로 깎아낸 한 됫박의 곡식 같았다 바람도 스치지 않았고 그림자도 없었다 물은 물인 채 부풀고자 했으나 아직은 아니었다 녹슨 함석 담장 옆으로 모래가 쌓여 있었다 첫삽을 뜬다면 얼마만큼 파일까 사람이 서 있는 자리마다 길이 갈라지고 있었다 줄일 수 있는 데까지 볼륨을 낮추며 내가 앉았던 자리를 위해 오늘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손끝 - 최세라 엉겅퀴 피는 계절이면 보랏빛 입술 바르고 건천에 엎드리고 싶다 가뭄이 할퀴고 간 미소와 마..

한줄 詩 2021.05.26

천장(天葬) - 강신애

천장(天葬) - 강신애 나는 야크 똥을 주우러 다니던 아이 설수로 목을 축이던 소녀 놋주발을 돌리던 라마승이네 죽은 것 다시 죽여 살아나는 활개 냄새가 다른 피, 코와 팔다리를 삭혀 부유하는 천년의 짐승이네 나는 높은 곳 연모하던 살점들이 빛으로 짓고 빛으로 글자를 써 빛의 헝겊을 날리는 하늘사원의 전서구 모든 길은 허공으로 통해 부풀어오른 설풍마저 질긴 구애를 하네 신조(神鳥)도 설산에 푸른 그림자를 매달고 까마득한 공복에서 출발하네 긴 겨울과 희미한 볕뉘의 제물 누군가의 전 생애가 불이 되고 물이 되어가는 곳에 발톱과 초점이 나의 전부일 뿐 땀에 젖은 모자가 세 번 원을 그릴 때 튕기듯, 붉은 언덕으로 *시집/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문학동네 장갑 - 강신애 무덤에 바칠 꽃 한송이 가져오지..

한줄 詩 2021.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