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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 박남준 시집

박남준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을 냈다. 1984년 시 전문지 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으니 등단 37년이 되었다. 그 세월을 온전히 담아낸 시집이 총 여덟 권이다. 나는 그가 냈다는 몇 권의 산문집은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가 낸 시집 여덟 권은 빼 놓지 않고 읽었다. 초기 시부터 현재까지 그의 시풍을 온전히 느낀 셈이다. 내가 박남준 시집을 처음 만난 건 두 번째 시집으로 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다. 얼음장처럼 서늘하게 스치는 맑은 싯구에서 슬픔이 뚝뚝 묻어났다. 시에 눈도 뜨도 못했던 내가 이 시집을 읽게 된 것은 우연히 라는 그룹 사보에 실린 모악산방 소식과 시인의 인터뷰를 보면서다. 허무주의가 사무치도록 온 몸에 박힌 사람이었다. 그때 느낀 생각이 이 사람 오래 살지 못하겠구나였다. ..

네줄 冊 2021.05.21

위험하다 스치기만 했는데 - 이기영

위험하다 스치기만 했는데 - 이기영 기를 쓰고 달아나는 걸 붙잡아 매달아 둔 발이었다 투명하지 않아서 상처 뒤는 더더욱 알 수 없고 빛의 행방을 쫓아 빨리 뛰어가는 심장이었다가 희미한 광기를 완성하면 비로소 반짝이는 눈물이었다가 난무하는 추측이었다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숨기기 좋은 딱 그만큼의 달빛이 스친다는 건, 반쯤은 다른 타인으로 속수무책으로 지우고 싶은 지워지고 싶은 것들을 꺼내 눈먼 사람 몰래 흘리고 가는 것 그것은 차마, 나를 말할 수 없는 것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환절기 - 이기영 묶여 있는 개가 미동도 없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 나비가 난다 나비는 꽃이 일러 준 방향으로 날아가고 바람이 멋대로 동작을 바꾸면서 계속해서 나비를 흔들어도 그걸 춤이라고 ..

한줄 詩 2021.05.21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 허문태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 허문태 잠시라는 것도 보인다는 것도 들판의 문제다.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문득 들판의 문제다. 어느 봄날 민들레를 한없이 보고 있었던 것이, 노랑나비가 앉아 있는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냇물의 소리는 부딪치는 소리라서 나보다 맑다고 생각했다. 다 들판의 문제다 지금은 겨울 들판에서 저수지가 보였을 때 기러기는 저공비행을 한다.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서너 명씩 너덧 명씩 식탁에 둘러앉았다. 일인용 식탁은 없고 사인용 식탁에 혼자 식사하는 경우는 있다. 잠시 뭔가가 보일 때 얼른 봐두자. 꽃이 피는 곳은 어디고 나무는 어디로 걸어가는지, 나는 아직 늙어서 손에 굳은살이 두툼한 사람들과 식사를 한다. 괘종시계 초침 소리가 ..

한줄 詩 2021.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