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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는 사막 - 이기록

출렁이는 사막 - 이기록 고백처럼 날 것의 유목 생활을 시작합니다 만찬을 기다리며 고개 숙이고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지만 새기지 않은 문신만 탁자 위에 남았답니다 두 발로 선 적 없는 매일매일 기억하는 일에 그만큼의 잔이 필요한 것은 꼬리를 잃어버린 어제 때문입니다 코가 간질간질한 밤엔 당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을 수 있을까요 철거된 그림자가 웅크린 채 깨어나고 있어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건조한 이름들이 천장에서 떨어지자 눈을 들기 시작하지요 뻗어가는 시간을 주워들면 사라진 말은 습하지만 마른 것은 손가락이에요 손가락을 깨물면 부두교의 주문처럼 다시 살아날 겁니다 간절한 당신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나 봐요 먼 곳을 돌아왔나 봐요 만질수록 가시 박힌 손에서는 피가 납니다 마른 가슴만 차오르는 날들입니다 감당..

한줄 詩 2021.08.10

시소 - 권수진

시소 - 권수진 내가 바닥을 치는 순간 당신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지 당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내가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것처럼 늘 서로의 균형점을 맞추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수평적 사이가 아니란 걸 알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어 서로 얼굴 마주 보며 대면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지 농담을 주고받는 거리는 아니었어 때론 운명의 장난 같기도 했어 사람과 사람 사이 살면서 엎치락뒤치락해도 이렇게 엇갈린 경우는 없었으니까 해맑게 뛰어놀던 아이들 하나둘씩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놀이터에서 너와 단둘이 남던 어느 날 어색한 기운이 주변을 맴도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자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숙제 같았어 해 질 녘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한..

한줄 詩 2021.08.09

유산 - 조기조

유산 - 조기조 그는 오랫동안 나사를 박았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단단한 결속을 꿈꾸는 나사를 잘 보이지 않는 구멍을 향해 고개를 처박고 땀방울을 떨어뜨리며 힘껏 박고 돌리고 조여도 어느새 슬그머니 풀려버리던 나사 나사를 박다 풀려버린 그의 몸에도 나사 몇 개를 박아 넣었다 목뼈 한 토막을 잘라내고 세 마디를 한 토막으로 고정시켰다 그 나사들이 풀릴 때 그의 몸이 한줌 재로 바뀔 때 누군가 옆에 있게 된다면 이런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는 나사를 몇 개를 남기고 갔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 조기조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결할 수 없는 곤란에 부딪힐 때 당신은 기술자를 찾는다 컴퓨터가 고장일 때 보일러가 자동차가 멈췄을 때 당신은 기술자를 부른다 기술..

한줄 詩 2021.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