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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 심은 뜻은 - 이산하

벽오동 심은 뜻은 - 이산하 처음 강을 건너갈 때 나는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 깊이가 내 눈의 깊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수심이 얼마나 되든 끝까지 가본 자만이 가장 늦게 돌아온다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 강 한가운데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늙은 벽오동 한 그루가 지키고 있었다. 가지 위에는 일생 동안 부화할 때와 죽을 때만 무릎을 꺾는다는 백조 한 마리가 살며 생채기마다 부지런히 단청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허기지도록 적막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또 백조가 왜 벽오동을 떠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 삶의 무게가 조금씩 수심에 가까워질수록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있을 내 여생의 무늬가 강 가장자리로 퍼져나가며 단청이라도 한다면 내 비록 끝내 바닥에..

한줄 詩 2021.08.11

나 혼자 가야 여행 - 황윤

어쩌다 이 사람 책을 여러 권 읽게 된다.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인데 나 혼자 백제 여행을 읽으면서 팬이 되었다. 경주 여행에 이어 세 번째로 이 나왔다. 제목을 기막히게 잘 지었고 내용 또한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몰입이 된다. 책의 저자 황윤은 박물관 마니아다. 혼자 박물관과 유적지를 찾아 감상하고 공부하는 것이 휴식이자 큰 즐거움이란다. 누구 하나가 인스타그램에 맛집이나 괜찮은 여행지라고 소개하면 우르르 벌떼처럼 몰려가는 것이 최근 경향이다. 맛집이든 여행지든 흔히 핫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아무리 SNS 시대라지만 다양성이 사라지고 양극화는 심해진다. 빈부의 양극화도 문제지만 문화의 양극화도 심하면 문제가 생긴다. 저자 황윤의 책이 빛나는 것도 몰려다니는 여행이 아닌 혼자 가는 조용한 ..

네줄 冊 2021.08.10

밑장 - 권상진

밑장 - 권상진 기회는 언제나 뒤집어진 채로 온다 공평이란 바로 이런 것 이 판에 들면 잘 섞어진 기회를 정확한 순서에 받을 수 있겠지 그래, 사는 일이란 쪼는 맛 딜러는 펼쳐놓은 이력서를 쓰윽 훑어보고 몇 장의 질문들을 능숙하게 돌린다 손에 쥔 패와 돌아오는 패는 일치되지 않는 무늬와 숫자로 모여들던 가족들의 저녁 표정 같았지만 여기서 덮을 수는 없는 일 비밀스레 돌아오는 마지막 패에는 섞이듯 섞이지 않는 카드가 있었고 꾼들은 그걸 밑장이라 불렀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밑장을 빼내 옆자리에 쓸쩍 밀어줄 때, 딜러의 음흉한 표정이 밑장의 뒷면에 슬쩍 비치고 있었다 계절이 지나도록 판은 계속된다 어제 함께 국밥을 말아먹고 헤어졌던 이들이 더러는 있고 한둘은 보이지 않는 새 판에서 겨우내 패를 덮고 있던 나무..

한줄 詩 2021.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