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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강현실 - 이문재

증강현실 - 이문재 뛰지 말라 전파를 더 많이 맞는다 가만히 서 있지 말라 몸에 부딪쳐 부서지는 전파가 무릎까지 쌓인다 걸어다니지 말라 옷이 전파에 절어 너덜너덜해진다 살갗이 전파에 맞아 시퍼렇게 멍든다 숨 쉬지 말라 전파가 허파꽈리에 가득 차 딱딱해진다 눈 뜨지 말라 망막 안쪽이 긁힌다 전파 전파 전파가 쏟아진다 위아래 앞뒤 왼쪽 오른쪽 전방위에서 초강력 전파가 쉬지 않고 달려든다 폭풍처럼 폭우처럼 폭설처럼 쓰나미처럼 화산처럼 지진처럼 눈사태처럼 정전처럼 감전처럼 단전처럼 누전처럼 신종플루처럼 광우병처럼 조류독감처럼 구제역처럼 전파가 지구를 뒤덮고 있다 옷을 털지 말라 전파 부스러기 떨어진다 물로 씻지도 말라 전파가 몸을 관통하고 있다 실제 상황이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사랑과 평화 - 이문재 ..

한줄 詩 2021.11.25

묻는다 물어야 해서 - 안태현

묻는다 물어야 해서 - 안태현 머잖아 겨울이 오면 마스크를 벗고 내 반의 얼굴을 드러내도 되나 앙상한 늑골 사이로 주린 바람이 달려가는 도시의 귀퉁이 탁자에 희박하게 앉아 얼큰한 육개장을 마음껏 먹어도 되나 집 냄새에 찌든 사람이 모처럼 노선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묻혀온 무덤이 따로 없더라는 진흙 같은 적막함 여기까지 왔대 느닷없는 소름이 이웃 아파트 단지까지 밀고 오면 나는 뒷문을 하나 더 만들어 놓는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짐승이 들뜬 분위기를 퍼뜨려놓고 이제나 저제나 방심을 기다리는 왕국의 동토 지대를 쏜 살보다 빠르게 건너갈 수 있나 만화경을 돌린 듯이 모든 걸 헝클어버린 이간질 같은 안개 숲 기울어진 것은 균형을 찾으려 수십 번은 흔들리고 자작나무처럼 하얀 껍질을 벗으면 그 사이 몇..

한줄 詩 2021.11.22

위험한 의식 - 김윤환

위험한 의식 - 김윤환 태초에 세족식은 없었다 사람이 만든 거룩함이란 발바닥에 찍힌 생애의 지도가 흐물흐물 풀어지는 쓸쓸한 주문(呪文) 같은 것 확인되지 않는 청결의 율법 발보다 깨끗한 손이 아니라면 타인의 발을 씻는 일은 언제나 절벽의 의식 노아의 홍수 이래 무균의 샘은 없었다 정화수에 비친 제사장의 얼굴 그 눈에 티끌은 어찌하랴 새벽을 창조한 신이 사람의 발을 씻는 날 한번만 허용되는 그 위험한 의식에서 나는 내 발에 묻은 지도를 아프게 아프게 떼고 있었네 발을 씻는다는 것은 껍질을 벗겨낸다는 것 발등에 떨어진 하늘을 건진다는 것 발목을 떼어 하늘로 보낸다는 것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주일서정(主日抒情) - 김윤환 저기 휘청이며 오는 교인들의 날숨소리를 주워 담는 예배당 계단 날마..

한줄 詩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