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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방 - 홍성식

길 위의 방 - 홍성식 소진한 기력으론 신(神)을 만나지 못한다 황무지에 달이 뜨면 갸르릉 도둑고양이 울고 집 나간 누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 밥상에 마주 앉은 데드마스크들 시간은 석고처럼 창백하게 굳고 조롱의 숟가락질, 싸늘한 만찬이 끝나면 표정 없이 젖은 침대에 드는 사람들 어쨌거나 창 너머 달은 또 뜨는데 째각대는 시계 소리에 맞춰 계단을 올라 어둡고 축축한 방, 문을 열면 나신의 엄마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하얀 비포장길 꿈에서도 달맞이꽃은 흐드러졌는데 길을 잃은 자, 길 위에는 방이 없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불혹 - 홍성식 길 위에서 길을 찾다 길에 눕는다 메마른 얼굴을 쓰다듬는 유년의 바람 해서, 내내 낯선 길만이 매혹적이었다 열아홉, 스트리퍼의 젖꼭지를 본 날 우주는 ..

한줄 詩 2021.11.26

나는 울었네 - 주현미

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 저 달이 나를 속일 줄 나는 울었네 나는 울었네 나루터 언덕에서 손목을 잡고 다시 오마던 그 님은 소식 없고 나만 홀로 이슬에 젖어 달빛에 젖어 밤새도록 나는 울었소 나는 속았네 나는 속았네 무정한 봄바람에 달도 기울고 별도 흐르고 강물도 흘러 갔소 가슴에 안겨 흐느껴 울던 그대는 어딜 가고 나만 홀로 이 밤을 세워 울어 보련다 쓸쓸한 밤 야속한 님아 #신기하지, 무슨 노인네처럼 이런 노래가 좋아지는 걸까. 섹소폰이든 아코디언이든 구슬픈 뽕짝 선율이 술기운 퍼지는 것처럼 혈관 속으로 파고드는 가을 밤이다. 어릴 때부터 슬픈 뽕짝이 좋았던 걸 보면 아마도 무당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 없는 전염병 시국에도 가을은 왔고 잠시 머물던 가을이 서둘러 떠났다. 일찍 찾아온 한..

두줄 音 2021.11.25

폐막식을 위하여 - 서윤후

폐막식을 위하여 - 서윤후 ​ 이 무대를 끝내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서둘러 빛을 꺼내려고 벼락을 샅샅이 뒤지던 날에 기록한 망가진 그날의 일기가 오늘 무대의 조명을 갖춘다 인형탈을 벗고 쉬는 용서를 보았을 때 지혈되지 않던 밤의 기쁨을 알게 되고 함부로 깨웠다가 영영 잠들지 않는 자명종을 목에 걸어주고는 꿈에서만 참견하는 악몽이 되어주기로 한다 익숙하고 끔찍한 친절함으로 골절된 영혼의 인형극에 몰입하며 차례를 기다린 건지도 바닥난 사랑에도 이 무대는 영영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의 독백을 지우고는 삶을 퇴고하게 된다 다음 행복을 모사하는 것도 슬픔이 가진 배역이었기에 머지않은 출구를 열지 못하고 벼랑 끝에 서 있다 무대에 두고 온 이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누구도 버린 적 없어서 아무도 끝까지 읽..

한줄 詩 2021.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