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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적이라는 방이 있었다 - 이은심

작위적이라는 방이 있었다 - 이은심 문을 두드린다 응답하지 않는다 안에서 밖을 잠근다 견디는 방식이 문제다 문을 연다 텅 빈 방이 방을 업고 나간다 못 견디는 방식이 문제다 독실한 내일에 월세를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뺨을 지나 옷깃을 지나 한없이 빈곤한 고양이가 트럭 밑에서 비에 젖은 바닥을 꺼내온다 고양이도 생활고를 알까 모과를 떨어뜨린 나무와 아이를 놓친 창문과 종일 식탁보처럼 흘러내려서 백수인 거야 바닥을 다 울고 나면 울음은 또 어떤 바닥을 쳐야 하나 내일이라는 방을 예약하지 않고 갑자기 알게 된 슬픔 앞에 빈방만 놓고 돌아섰다 나도 내 젊음에 폐업 쪽지를 붙이고 싶을 때가 있었으므로 그 쪽지가 너풀거리는 곳에 흰 꽃 한 송이 두고 싶을 때가 있었으므로 *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상..

한줄 詩 2021.11.30

오늘은 없는 날 - 김선우

오늘은 없는 날 - 김선우 ​ 아무것도 안 하는 중이에요 행복하고 싶어서 정치 마케팅과 상품 마케팅에 유혹당하지 않게 말 많고 현란한 매체들에 귀 닫고 눈 감아요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필요와 정의 타령에 넘어갈까봐 하늘을 봐요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 눈 뜨니 오늘이 있어 없는 날이라 부르기로 해요 없는 날에 할 일은 바람 속에서 시집 몇 페이지를 천천히 읽고 아침과 저녁의 산책을 출생 이전처럼 하는 것 지구가 우주의 일원으로 오늘을 걷고 운 좋게 지구에 탑승한 오십년 차 승객인 나도 지구와 함께 걸어요 지구 입장에선 자갈돌 하나인 나 우주의 입장에선 티끌 한 점도 안 되는 나 이토록 작은 존재에 허락된 하루를 오직 감사하면서 오늘은 없는 날 행복하고 싶어서 구름 버튼..

한줄 詩 2021.11.30

순간의 바깥 - 이문희

순간의 바깥 - 이문희 내가백합과 목련의 다름을 인정해서 겨울이 왔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사바나를 구글에서 검색하다가 검은 기린 흰 기린을 처음 보았다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 끝 적도에는 아까시나무와 바오바브나무가 보인다 한 여자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마당엔 빨래가 깃발처럼 펄럭인다 향기로운 꽃들이 피었다 지는 사이 사랑의 중심엔 커피가 끓고 있다 침대 모서리엔 남자의 파자마가 걸쳐 있고 어젯밤 쓴 시가 화장대 위에 반쯤 구겨져 있다 검은 기린은 얼마나 고민이 많아 검게 되었을까 왜 나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다시 봐도 검은 기린은 나 같고 흰 기린은 너 같은 나를 꼭 닮은 검은 기린을 생각하면 겁 많은 눈으로 멀리 표정을 살피다 물기 젖은 나뭇잎을 먹고 속눈썹에 잠이 맺혀 별을 당긴다 너를 닮은 흰 기..

한줄 詩 2021.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