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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나이 - 김기리

서쪽의 나이 - 김기리 서쪽의 나이에서는 가랑잎 소리가 난다. 손으로 꼽아 보면 손끝이 시려 오는 저녁이 있다. 짚가리 냄새가 나고 검불 연기를 좋아하는 나이 서쪽의 나이에는 시린 등이 있다. 돌아앉아 있는 외면하는 방향이 있다. 서쪽의 나이를 서성이다 보면 발등이 시려 오고 환했던 겨울마다 흰 서리가 내린다. 은일자라 불리는 국화가 제철이다. 봄꽃은 놀이를 가야 제 맛이지만 방문만 열면 볼 수 있는 국화는 서쪽 나이에 이르러 가꾸기 가장 좋은 꽃 동쪽의 나이들이 찾아들고 북쪽 나이로 두서너 걸음 들어섰음에도 남쪽 나이 이끌고 동쪽이나 서쪽의 나이로 살고 싶은 것이다 고독의 문패를 내다 거는 북쪽 나이 폐일언(蔽一言)하고 동서남북 네 갈래 나이를 한데 버무려 시루에 담아 푹 쪄서 절구통에 부어 놓고 떡메..

한줄 詩 2022.01.17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 - 강재남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 - 강재남 우는 법을 잘못 배웠구나 바람은 딴 곳에 마음을 두어 근심이고 환절기는 한꺼번에 와서 낯설었다 오후를 지나는 구름이 낡은 꽃등에 앉는다 매일 같은 말을 하는 그는 옹색한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서다 눈시울 붉히는 꽃은 비극을 좀 아는 눈치다 비통한 주름이 미간에 잡힌다 구름의 걸음을 가늠하는 것만큼 알 수 없는 꽃의 속내 연한 심장을 가진 꽃은 병들기 좋은 체질을 가졌다 그러므로 생의 어느 간절함에서 얼굴 하나 버리면 다음 생에도 붉을 것이다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계절에는 풍경이 먼저 쏟아졌다 헐거운 얼굴이 간단없이 헐린다 낭만을 허비한 구름은 말귀가 어둡다 색을 다한 그가 급하게 손을 내민다 구름이 무덤으로 눕기 전에 꽃은 더 간절해져야 하므로 울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친절한..

한줄 詩 2022.01.17

우주를 만지다 - 홍성식

우주를 만지다 - 홍성식 자정 넘긴 지하 술집 스물둘 생일을 맞았다는 여급의 조그만 젖꼭지를 만지작거린다 태초의 혼돈이 이처럼 말랑말랑할까 닳은 지문 아래 깨어나는 옛날 검지와 엄지가 우주를 기억해냈다 알려주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죄 젖꼭지 혹은, 우주 앞에 허물어지고 멀리 있는 것들만 취기 없이도 행복하다 말캉거리며 피어나는 꽃들 꽃판에 그려진 적두색 유채화가 해독불가 우주의 비밀스러움과 닮았다 소유할 수 없는 이름 탓에 떠돈 생 기억되는 사건은 왜 남루할 뿐인지 다시 젖꼭지를 비틀며 우주를 만진다 되돌릴 수 있다면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도 없이 오래도록 멀리 떠돌았다 젖꼭지가 흐느낀다 우주가 운다 만질수록 비밀스러워지는 것들이 흐느껴 운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저 좁은 ..

한줄 詩 2022.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