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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암에서 - 박남원

백장암에서 - 박남원 찬 바람 아직 부는 이른 봄 산굽이 물굽이 짚신처럼 길을 떠나 지리산 백장암 같은 곳에 가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잔설이 밀가루처럼 남아있는 산지붕이 코앞까지 다가오며 백장의 거친 숨결이 어슬렁거리듯 넘나드는 천의 계곡 굽이쳐 흐르는 물살이 일순 저승처럼 아찔한 발아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기 일쑤지만 그 어지러운 기슭을 올라 일단 백장암 마당까지 이르기만 하면 두툼한 이끼를 탑신에 털옷처럼 입은 삼층석탑이 놓인 절 마당에 오르는 동안 내내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던 지리산이 오히려 그곳에서는 한 식구처럼 모여 있고 세상 너른 바다도 잔잔한 파도로 고스란히 앉아 있다. 지심 깊은 꽃 숨결이 힘겹게 지상으로 밀려 올라오는 이른 봄 백장계곡. 아직 바람 불고 살 시린 발아래 세상, 마저 ..

한줄 詩 2022.03.08

귀향 - 이현조

귀향 - 이현조 무서울 것도 안 될 것도 없는 서른을 지나 만만한 것도 되는 것도 없는 마흔을 지나 도망치듯 돌아와 슬하에 들던 날 중년의 아비는 두려움 가득했고 노년의 아비는 암 덩이 가득했다 다 잃은 아비와 다 버린 아비는 마주 보는 거울만 같아서 사랑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상례라 독설만 퍼부어댈 때 노년의 아비 담 그늘 향해 혼자서 되뇐 말 유언이 되고 말았다 난 그래도 넷 중에 니가 젤 잘될 줄 알았다 *시집/ 늦은 꽃/ 삶창 언덕 - 이현조 아버지 초상에 형은 파묘를 들먹였다 벌초 한 번 해본 적 없는 형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므로 산소 따위 무의미했다 눈물도 조의도 없는 초상 각자, 접대에 바빴다 할아버지 산소도 파할 것이므로 드넓은 바다에 아버지를 모셨다 할아버지 산소는 터가 좋다더라 무당의..

한줄 詩 2022.03.07

실수 같은 봄이 찾아와 - 김애리샤

실수 같은 봄이 찾아와 - 김애리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열었는데 초승달이 가느다랗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밤 적적한 공기 휘저으며 심호흡 한번 했는데 당신 냄새 섞여 있어 눈물 났던 밤 꼭 당신이 아니어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애써 결심했던 밤 문득문득 실수로 채워져 빛났던 그때들 나의 향기를 예쁘게 말려 간직하겠다던 당신의 노래들은 뒤척일수록 멀어지고 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볼품없어지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순간들 그렇고 그런 순간들처럼 딱딱한 공기로만 채워지던 우리 사이 만질 수 없는 꿈들이 계속되는 새벽 불면증처럼 울던 나의 표정들 차라리 더 아픈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 실수를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환했던 그때 세상 모든 밤들엔 ..

한줄 詩 2022.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