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산에 다녀왔다 - 고재종

마루안 2018. 4. 12. 23:01



산에 다녀왔다 - 고재종



유난히 연둣빛이 번지는 산에 다녀왔다
오늘 또 한 생을 묻고 돌아온 산엔
파닥이는 바람소리 아플 때 까지
산벚꽃 펄펄 날렸다


집 없으면 거지요
걸릴 것 없으면 스님이라던가
집도 절도 없이 寒酸(한산)한 어머니의 한산은
날리는 산벚꽃 낱낱으로
반짝거렸다


수십여 년 길을 물었으니
버럭바위에 꽃 피고 지길 몇 번이던가
누구나 항복하기 전에 이미
연둣빛에 들키고 지는 꽃잎에 잡히지만


서럽고 애달픈
어머니 울음 같은 것들의 내력을 건너
꽃으로도 꽃피지 않고
잎으로도 잎 지지 않을 일의
도모이거니


유난히 연둣빛이 한창인 산에 다녀왔다
한 생을 묵묵히 보내고
또 한 생을 받고 돌아오는 일은
늘 외롭고 장엄한 일이었다



*고재종 시집, 꽃의 권력, 문학수첩








자코메티 1 - 고재종



늦가을 강변, 잔광 속의 미루나무여
무장무장 스치는 쓸쓸함이여


이런 날이면, 삼류 인생에나 적합한
오줌색 갱지 빛깔을 닮은 삶의 내력들을
무너질 만큼 무너지는 박명 속에 부려 놓고


늦가을 강변, 억새꽃 노을 녘을 향해
긴 울음의 목을 쳐드는
황소의 바리톤 하나 정도는 건졌으련만


네가 보고 싶어 울었다, 는
삼류 소설의 지문 같은 것으로나
내 하루 분량의 고독을 세우는 자코메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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