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목련이 떨어진 이유 - 이병승

마루안 2018. 4. 12. 23:15



목련이 떨어진 이유 - 이병승



매 순간 조금씩 변하는 햇빛을
꽃잎이 아닌 피부로 느끼고 싶었을 거다
바람의 숨결을 귓불로 느끼고
말랑한 입술로 속삭이고 싶었을 거다
새소리를 귀로 듣고
강물에 몸을 적셔도 보고 싶었을 거다
허공 속을 휘젓고
산 너머 풍경도 보고 싶었을 거다
황홀한 폭설에 묻혀보고도 싶었을 거다


뚝!
절정의 낙하


산산이 부서지는 격렬함으로
불가능한 변형을 꿈꾸는,
죽음을 관통해서라도



*시집,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실천문학사








꽃의 기원 - 이병승



애초에 타일 벽에는 못을 박지 않는 법이다
그래도 한번, 타일 벽에 못을 대고 망치로 때리자
허공을 가르며 파편이 튄다
타일은 못이 파고들 틈을 허락치 않고
대신 저항의 살점을 꽃잎처럼 내놓는다
단 한 구멍도 내놓지 않겠다는 고집은
때로 못을 튕겨내거나, 구부러뜨리거나
아예 부러뜨리기도 한다
때리는 자의 주의력을 뭉개버리는 저 집요한 고집
에라, 모르겠다 마구 망치질 하면
귀청을 때리는 비명을 지르며
꽃잎처럼 허공으로 튀는 꽃, 꽃, 꽃
쫙 갈라져버린 타일 벽의 한 줄기 빗금은 꽃의 줄기다
어쩌면 꽃의 기원은 충격이다
꽃의 양분은 싸움이고 저항이며
꽃의 형식은 파편이다
살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했을 때
무언가가 심장을 찌르고 들어올 때
어처구니없이 터져 나오는 헛웃음처럼
혹은 깨문 이빨처럼
딱딱하고 날카로운 꽃잎이 도처에서
순식간에 핀다, 튄다





# 문단에 나온 지 25년에 만에 낸 시인의 첫 시집이다. 보석처럼 박히는 마음 가는 시가 여럿이다. 시인의 말을 옮긴다.


시인의 말


나는 언어유희와 자폐적 서정으로 가득한 우울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위의 극단으로 소통 불가를 외치는 홀로 고고한 시도 좋아하지 않는다.
밝고 건강한 시, 삶을 사랑하게 하는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시가 좋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마음이 담긴 시,
어둠의 밑바닥을 치고 올라 빛을 향해 솟구치는 시,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도 끝내 희망을 잃지 않는 시,
사람을 품어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가 좋다. 나에게 시란, 시대를 관통하는 무기이자 생의를 뒤흔드는 것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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