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게 온 봄을 피하지 못함 - 전동균

마루안 2018. 4. 11. 19:55



늦게 온 봄을 피하지 못함 - 전동균



분도수도원 마당에 앉아
서로 뺨을 비비며
잇바디 고운 바람 소리 풀어내는
초록들을 보네


하늘이 처음 내려왔을 때 그 빛으로
땅이 처음 솟았을 때 그 냄새로


찰랑대는 봄볕 속에 무릎 끌어안고 앉아
조막손 햇잎들을 바라볼 뿐인데
명치를 짓누르는 통증들


어떤 큰 슬픔 속에서도 들키지 않는 사랑이,
사랑의 작은 입술들이 숨어 있어
이 햇볕, 초록들을 보내주고 있는지


내가 나기 전의 나와
세상이 있기 전의 한 세상을 생각하며


남의 것 같은 손을 멀리 내밀어 찾아보네
어제는 없었던 것들,
내일이면 사라질 것들의 반짝임을 안고
바람이 불어가는 곳을


이제 돌아갈 자궁이 내게는 없으니
나는 내 장례를 지켜볼 것이니



*전동균 시집, 우리처럼 낯선, 창비








낮술 몇잔 - 전동균



아니 왜, 회촌 개울 햇살들은
떠듬떠듬 책 읽는 아이 목소리를 내는지,
징검돌 위에 주저앉은 나는
담배나 한대 피워 무는 것인데


휴가를 얻어도 갈 데 없는
이 게으르고 남루한 생은
탁발 나왔다가 주막집 불목하니가 되어버린 땡추 같은 것,
맨 정신으로는 도무지 제 낯짝을 마주 볼 수 없어
마른 풀과 더불어
낮술 몇잔 나누는 것인데


아 좋구나, 이 늦가을 날
허물고 떠나야 할 집도 없는 나는
세상에 나와
낭끝 같은, 부서질수록 환한 낭끝의 파도 같은 여자의 눈을
내 것인 양 껴안은 죄밖에 없으니
산자와 죽은 이의 숨소리가 함부로 뒤섞여
달아오른 바람을 마시면서
덤불의 새들이나 놀래켜 흩는 거라,
떨어지는 대추알들이며 그만큼 낮아지는 하늘들이며
수많은 헛것들 지나간 뒤에
잠시 커지는 물소리를 향해
큰절 올리는 시늉도 두어번, 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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