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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 김경성

실크로드 - 김경성 신당동 집 아래층 양복공장 실크로드에서 카펫을 짜던 사람이 있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재봉틀 소리 사막으로 돌아갈 길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안개 걷히지 않은 새벽 여섯 시 낙타를 타고 먼길 떠나는 사람의 손끝 아린 비단 실 씨실 날실 그가 걸어갈 길의 무늬를 그린다 온종일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던 길 돌아보면 발자국은 바람에 지워져 있었다 밤새 짜던 카펫 속 길, 모퉁이에 앉아 마시는 박하차처럼 마음 끝에 걸리는 알싸한 실타래는 다음 날 새벽이 오도록 멈추지 않는다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재봉틀 소리를 타고 실크로드를 걷는다 샹그릴라는 멀지 않다 *시집, 와온, 문학의전당 와온(臥溫) - 김경성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으니 멈추는 곳이 와온(臥溫)이다 일방통행으로 걷는 길 바람만이 스쳐갈 뿐 ..

한줄 詩 2018.12.02

유언(遺言)의 형식 - 김주대

유언(遺言)의 형식 - 김주대 그대를 이토록 사랑하는 것은 죽음이 가까운 곳에 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대를 사랑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아서 더 열렬한 것은 아니다 살아서의 사랑으로 그대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면 내 죽음이 그대를 일으켜 세우리라 나 죽어 땅으로 돌아가는 날 그대가 통곡하며 어느 거리를 걷더라도 그대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나 죽어 하늘로 돌아가는 날 그대가 사는 어느 하늘 아래에도 내 눈물의 비가 그대를 적시리라 그대의 슬픈 과거를 씻을 만큼 울다가 눈물이 다하면 바람으로 와서 그대 젖은 몸의 슬픔을 거두어 가리라 떨리는 손가락으로 남은 날을 헤아리며 달력을 넘긴다 아, 그대를 이토록 사랑하는 것은 죽음이 가까운 곳에 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시집, 꽃이 너를 지운다, 천년의시작 후..

한줄 詩 2018.12.01

달력 - 이강산

달력 - 이강산 ​ - 색시, 달력 나왔어? - 며칠 더 기다려야 돼요, 할아버지. 지게송장으로 떠난, 아버지의 형님을 꼭 빼박은 중늙이가 농협 달력을 못 얻고 돌아간다 12월 달력처럼 이제 한 장만 남았는지 몸이 얇다 가으내 밟았던, 물 마른 호수다 저 호수, 아흔 넉 장쯤 가을 뜯어냈을까 돋보기를 쓰지 않아도 숫자가 훤히 보이는 달력은 물이 철철 넘치던 호수의 젊은 시절 문풍지가 되었다가 벽지가 되었다가 요강 받침이 되었을 터인데 뼈만 남은 호수 이젠 무슨 소용이 있을까, 궁금해지다가 나는 그래도 한 세대 남짓 강변에 살았던 깜냥으로 석삼년 가뭄에도 강의 밑바닥 못 본 까닭으로 사막 같은 저 호수가 품고 있을 물의 깊이를 가늠해보는 것인데 급한 가을밤, 내게 그러했듯 아버지 형제의 똥구멍을 긁고 지나..

한줄 詩 2018.12.01

딱지 - 이돈형

딱지 - 이돈형 8차선 도로에서 우회전을 하는데 앳된 순경이 수신호로 나를 세운다 안전벨트 착용으로 구부정한 시절을 안전하게 가고 있었는데 차선 위반도 아닌 과속도 아닌 우측 깜빡이를 켜지 않아 딱지를 떼야 한단다 거수경례도 없이 깜빡, 깜빡 내가 좌파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좌파가 신호도 없이 우측으로 돌아선 게 문제였다 우파였다면 무사통과였을걸 놀랄 만도 했겠다 싶어 운전면허증을 건네준다 속전속결 세수증진의 시대 그 자리에서 범칙금 통지서를 발급받아 위반 내용을 살펴보니 '제차 신호 조작 불이행' 뭐여? 삼만 원이 안녕한 길에서 날아가 버리는 안전벨트를 풀어헤치고 질주하고 싶어지는 좌파의 깜빡이 없는 우회전 *시집.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천년의시작 패(牌) - 이돈형 패에서는 뼈를 오랫동안 우려낸 ..

한줄 詩 2018.11.30

가을밤 - 이연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팔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엄마 엄마 나 죽거든 앞산에 묻지 말고 뒷산에도 묻지 말고 양지 쪽에 묻어 줘 비 오면 덮어 주고 눈 오면 쓸어 줘 내 친구가 찾아 와도 엄마 엄마 울지 마 울 밑에 귀두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 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을 엄마 엄마 찾으며 날아갑니다

두줄 音 2018.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