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에 의한 사설 - 류정환
먼 이야기처럼 지붕을 넘고
문턱을 넘어오는 빗소리.
겨울에 비가 내리면 잠이 오지 않는다.
누가 다녀가는가, 조용한 발소리
열어 볼 수도 없고
열어 보지 않을 수도 없는 문 쪽으로
걸레처럼 풀어진 어둠의 강.
어디쯤에서 솟구치기 위해 우리는
이다지도 흐르고 싶은가.
흘러서 거침없이 물이 되고 싶은가.
강물이여, 속절없이 젖는 도시를 보아라.
물결에 떠밀리고 떠밀린 끝,
벼랑 같은 방마다 쥐똥같이 굳어 가는 눈동자들,
천 갈래로 해매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날마다 낮아지는 어깨와
이불을 당겨 덮어도 다 가리지 못하는 벌건 몸뚱아리.
이 불길한 도시에 누가 또 몸을 던니는가,
웅성거리는 창밖 빗소리.
불을 끌 수도 켜 둘 수도 없는
겨울에 비가 내리면 유난히 밤이 길다.
*시집, 붉은 눈 가족, 고두미
철없는 사내 - 류정환
연속극이라는 것이 보면 볼수록 자꾸 보게 된다는 걸 그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적을 알면 지지 않는 법이라고, 중독의 유혹에 절대 빠지지 않을 자신도 있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멀미나는 삶에 집착이 생기는 것처럼, 보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시간이 되면 TV에 눈을 고정시키고 그렇고 그런 얘기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저 사내- 착한 사람들의 생활이 자꾸 어긋나면 안타깝고 속이 타는, 못된 인간을 보면 화가 나고 피가 솟구치는, 그림 같은 사랑 이야기를 보면 자꾸만 웃음이 나고 가슴이 뛰고 TV를 켜도 잠이 오지 않는, 죄다 꾸며낸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여주인공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적을 알면서도 자신을 모르는, 서른이 훌쩍 넘은 저 사내.
*自序
굳이 말하자면 첫 시집, 한세월 시와 함께 잘 놀았다.
시는 늘 손님처럼 왔다. 처음엔 적잖이 서먹서먹하였지만 이젠 피차 길들여져 허물없는 사이가 된 듯하다. 내가 시에 집착했던 것보다 더 많은 날들을 시가 나를 붙들어 주었다고, 시마저 없었다면 이나마도 나를 세울 수 없었을 거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는 시일뿐 다른 무엇이 아닐 때 가장 편하다는 믿음에 도달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시는 내게 손님이다. 나는 마음을 다하여 맞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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