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 서규정
반송동 화훼단지 앞 꽉 막힌 버스 속이다. 기사님께서
뒤에 껌 씹는 아지매 껌 씹지 마소 아침부터 신경 쓰이고로
그라믄 신경만 끄고 가소
씹지 마소
앞만 보고 가소
아줌마 절대 지지 않는다
보소 녹수청산에 붙는 불도 님 찾는 여우꼬리에서 붙고 먼 바다 해일도 놓친 물고기 비늘 하나 때문에 뭍으로 오는 기라 우째 남자가 껌 씹는 소릴 몬 참고 이 퉁박이가
그 입 닫으소 아가리라 부르기 전에 엉!
보소 이 냥반아 여기 새끼손톱만한 꽃들도 세상을 딱딱 씹으려 피어나는 거 안 보이나 당신은 또 이 버스의 대통령 아닌가 베
손님은 왕인데 오데 대통령 따위가 앙야!
한 마디 더 쏘고 유적 발굴 중인 동래 시장에 아줌마는 내렸다
누구 여편넨지 골 때려 부리네 쯧! 질곡을 건너는 목소리엔 진흙들이 묻어난다 버스는 거의 다 까 발라진 옛 취락지를 돌아 나가는 동안 잊혀질 만큼 잊혀진 내 악연 하나도 풍화의 온도로 다시 다져져 간다
*시집, 참 잘 익은 무릎, 신생
문신 - 서규정
오랜만에 자갈치에 나와, 오천 원짜리 병어회무침을 시켜놓고선
소주 한 잔 고개 꺾어 탁 털어 넣고 있을 때
뭣! 치우다만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금방 나보고 그랬제
내 또래의 사내가 버럭 소릴 지르더니 막 덤벼드는 것이다
니 내 누군지 알아!
니는 또 뭐꼬, 국가공인 기초생활수급자로 초장동 초삥이* 아이가
일흔도 훨씬 넘었다는 할매가 손님을 보호하려고 막아선다
같이 가자, 당신도
덧난 욕망과 이념의 길모퉁이에 비켜서서 우물쭈물 하다
젊음을 다 날려버렸을 터이고
빈민이란 족보 하나 얻는데 육십년은 족히 걸렸을 것 아닌가
걸핏하면 마르기 십상인 눈물이라는 무늬보다
눈에 선 핏발, 그것이라도 문신으로 새기며 조용히 따라 가자
잉여의, 잉여를 위한, 우린 지금 어깨에도 없는 겨드랑이의 시절이니까
*초삥이: 주정뱅이
*시집,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작가세계
# 어제 지하철에서 노인들끼리 다투는 모습을 봤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 나이를 들먹이며 큰 소리로 싸웠다.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 정서가 많이 매말라 있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고 화를 자주 낸다. 완전 봉쇄에 들어간 나라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인가. 가끔 내가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질 때면 calm down을 말하던 외국 친구가 생각난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시 중에 기억을 되돌려 다시 찾아 읽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시에서 읽었을까. 시집들은 벌써 내 곁을 떠났지만 감동은 남아 있다. 혼자 들여다 보는 블로그 다락방에서 서규정의 시를 찾았다. 그래, 그때 이 시를 읽으며 피식 웃었던 적이 있었지. 위 두 시는 읽을 때마다 쫄깃쫄깃하게 읽힌다. 부산 사투리에 섞인 사람 냄새 나는 시다. 시 잘 쓰는 시인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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