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두어 닢 그늘을 깔기까지는 - 홍신선

마루안 2022. 6. 11. 21:55

 

 

두어 닢 그늘을 깔기까지는 - 홍신선

 

 

마을 길섶 느티나무 밑동에 너덜대는 껍질들

길고양이가 발톱이라도 갈았는가 앞발 들어 할퀴었는가

지나는 어느 태풍에 생살 찢기거나

누군가의 가지치기하는 낫날에라도 찍혔는가

그렇게 더께 진 흉터를 숱하게 제 안에 숨기고 보듬어서야

나무는 암암리에 터득했는지

우람한 한 그루 고목으로 때때로 그늘 두어 닢씩 꺼내 펴 주곤 했다.

이제는 하릴없이 늙어

노골로 선 그 등줄기엔 반들반들

줄곧 세월이 오르내린 길도 나 있다.

 

사람도 뭇 것들에 두어 닢 그늘이라도 깔아 주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깊게 패인 상처들을 쟁여 안아야 하는가.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손에 관한 명상 - 홍신선

 

 

왠지 이즘 내 손은 움켜쥐거나 붙잡질 못한다.

찻숟가락을 집었는데 그놈은 제멋대로 탁자에 떨어져 구른다.

세면대에서 틀니를 닦다가도 놓친다. 낙하한 타일 바닥에 쨍그랑 나뒹군다.

그때그때 실착으로 물건들을 놓치고 나서는

이건 해탈이다 해탈이야·····

그들의 득의양양 수군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

내 손아귀에서 풀려나 이제는

저들도 사는 게 무슨 도구가 아닌 저 자신의 목적이라고

제풀에 본래로 돌아가는구나.

노질(老耋)의 이 나이는

뭇 물물(物物)이나 해탈 삼아 제 본래로 되돌리는 시절이구나.

 

아차차, 이번엔 꺼내던 약병이 뒹굴러 떨어져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 홍신선 시인은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찍다>, <직박구리의 봄노래>, <가을 근방 가재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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