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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할 자격 - 김륭

밥할 자격 - 김륭 쌀을 씻어 안치다, 문득 고양이 밥부터 챙긴다 이럴 땐 나도 발이 네 개인 것처럼 착하다 작은 밥그릇 앞에서 한순간 세상의 전부가 된 밥그릇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밥그릇 속에 머리부터 집어넣고서는 굳건하다 아기 고양이, 아기를 버티는 있는 네 개의 발 새가 온다, 나비가 온다, 발을 가지러 아기를 가지러 운 좋은 날이면 귀뚜라미를 톡톡 두드려 울음을 꺼내듯 한 생을 건너 밥그릇이다, 하나뿐인 밥그릇 하나를 지키기 위해 버티고 선 저, 네 개의 발은 잘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부장(副葬)이다 죽어서도 뛸 수 있는 심장의 상상력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 그랬다 *시집/ 나의 머랭 선생님/ 시인의 일요일 나는 이 이야기를 나의 머랭 선생님에게 해 주었다 - 김륭 좀 많이 늦었지만 결혼을..

한줄 詩 2022.04.21

행복 - 심재휘

행복 - 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은 날도 있어야지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신발 모양 어둠 - 심재휘 끈이 서로 묶인 운동화 한켤레가 전깃줄에 높이 걸려 있다 오래 바람에 흔들린 듯하다 어느 저녁에 울면서 맨발로 집으로 돌아간 키 작은 아이가 있었으리라 허공의 신발이야 어린 날의 추억이라고 치자 구두를 신어도 맨발 같던 저녁은 울음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구부정한 저녁은 당신에게 왜 추억이 되지 않나 오늘은 ..

한줄 詩 2022.04.21

내 작은 방 - 박노해 사진전

박노해 시인이 사진 에세이집 을 내면서 소박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문화계에서 그리 큰 관심을 받고 있진 않지만 박노해의 사진 에세이 시리즈는 계속 나오고 있다. 그가 시인으로 비주류였듯이 사진으로도 박노해는 비주류다. 천성이 비주류인 나는 이런 박노해가 좋다. 한때 노동자 시인으로 추앙 받았으나 목소리에 힘을 빼면서 시인은 더욱 비주류의 삶을 살고 있다. 사진집치고는 아주 작다. 작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엽서 크기 정도의 책이다. 책에 실린 사진 중에서 고른 작품이 이번 전시장에 걸렸다. 카페 2층에 있는 전시장도 아담하다. 사진은 감동적이다. 전부 흑백으로 찍었다. 인간에게 방은 태어남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 엄마의 자궁이 방이고 자기 방을 갖기 위해 평생을 바쳐 아파트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여덟 通 2022.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