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시 데뷔전 - 전대호

마루안 2022. 7. 5. 21:55

 

 

다시 데뷔전 - 전대호

 

 

늙음의 물매 가팔라진다.

지붕 위에 물방울이라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겠네.

 

후회가 있다면,

젖 뗄 때 아기여서

그 허전함 새겨두지 못한 것,

데뷔전 때 풋내기답게 얼어서

그 설렘 누리지 못한 것,

헤어질 때 술에 절어있어서

그 아픔 만끽하지 못한 것.

 

그래도 소꿉장난은 아니었으니,

쏟아붓는 장맛비야, 마땅히 네가

날 격려해야 하지 않겠니?

 

지붕 위에 물방울들아,

올림픽이 연기된 것은 얼마나 다행이냐!

머잖아 또 온다, 장난이 아닌 승부.

두근거리자, 다시 데뷔전이다.

 

 

*시집/ 지천명의 시간/ 글방과책방

 

 

 

 

 

 

나사렛 6 - 전대호

 

 

왜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지 알아?

고귀해서가 아냐, 끔찍한 동물이어서야!

묶어놓고 때릴 줄도 알거든.

내가 묶일지, 네가 묶일지

아무도 몰라.

 

오히려 링이 예외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타격의 절대다수는

참혹하게 일방적이다.

 

이발소마다 걸려있던 풍경화 속 평화,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논다는 가사,

늘 최선의 가능성이 실현된다는 믿음,

설마 그런 해맑고 티 없는 애들이 아직도 좋은 거니?

그래서 자꾸 성냥 긋고 클릭 질에 빠져드니?

 

석 달에 걸쳐 체중의 10퍼센트를 빼고 링에 올랐을 때,

저쪽 코너에서 누가 곧바로 올라오리라 예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몇 년째 혼자 링 위를 서성거리게 될 줄은 몰랐다.

내 눈에 찰랑거리는 독기가 너무 살벌해서인가 했는데,

실은 세상에서 승부가 사라진 지 오래여서다.

 

누굴 탓하겠니? 솔직히 우리에겐

무난히 휩쓸리는 삶이 더 어울리잖아.

비굴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어.

지금 숨 쉬는 놈들 다 마찬가지야!

 

뱀처럼 영리하게 굴라는,

나사렛 사람의 가르침을 품에 안고

유적이 된 링에서 생동하는 판으로 내려오며 기도한다.

 

돋아라, 독니야.

내 입에서 나가는 단어 하나하나에

채찍에 찢긴 살의 비명이 흥건하기를 감히 바란다.

우리의 비굴함을 똑바로 볼 것이다.

고상한 말로 썩어드는 상처를 분칠하지 않겠다.

독니야, 독니야, 어디에 꽂히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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