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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 정현우

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 정현우 시든 억새를 쥐고 당신에게 가는 길 눈구름에 입술을 그리면 어떤 슬픔이 내려앉을까 눈사람을 만들 때 당신의 눈빛이 무슨 색으로 변할까 은색의 숲이 심장이 뛰기 시작해 몸속에 목화들이 우거져 당신에게 가는 문병은 어디로 휘어질까 마른 목화솜을 쓸어 모으면 마음엔 서리지 않는 유리 입김, 단 한번 몸과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살려주세요 빌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몸과 캐럴의 종이 울던 밤 솜 같은 당신을 안아보았지 한 사람을 지우기 전에 이 슬픔이 끝나기 전에 한 문장만 읽히고 있었어 사는 거 별거 있었냐 그냥, 목화가 피어 울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그래, 엄마, 잘 자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용서 - 정현우 믿지도 않은 신에게 기도했다. 텅 빈 고해소에..

한줄 詩 2021.03.17

사내와 시계탑 - 전인식

사내와 시계탑 - 전인식 저물 무렵 역 광장 한 사내가 시계탑을 등에 메고 앉아 있다 어디에서나 삶은 고행이란 걸 미리 알아버린 듯 턱 괴고 앉은 등 뒤로 노을이 후광(後光)으로 퍼져 흐르고 있다 몇 개의 사막을 건너온 다 닳아빠진 운동화 바람이 기거하기 좋은 낡은 작업복 북서쪽에서 온 바람이 그를 알아보고 일으켜 세운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흔들리는 덤불숲 조금도 꼼짝 않는 몸 쓰러질 것 같은 가벼움이 세상 위에 떠 있다 말라빠진 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올 한 올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한 눈금씩 돌아가는 시곗바늘 시계탑을 등에 멘 한 사내 턱을 괴고 앉아 있다 갈 길 바쁜 사람들 대신 역 광장 비둘기들만 우르르 모여들어 법문 듣듯 보리수나무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시집/ 모란꽃 무늬 이불 ..

한줄 詩 2021.03.16

고구마 호수 - 이강산

고구마 호수 - 이강산 호숫가 늙은 여인이 고구마를 캔다 육지의 섬 같은 호수, 꽃을 든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가 닻을 내린 그 언덕배기 한사코 호수 쪽으로만 핏줄을 대던 고구마의 태를 끊고 있다 밭은 어느덧 붉은 호수다 봄마다 피어나는 청년의 붉은 꽃 같은 호수에 발목이 잠기는 줄도 모른 채 여인은 한 뿌리, 한 뿌리 호수를 캔다 짐작건대 호수의 뿌리를 어루만지는 저 여인도 한때는 꽃을 품은 청년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붉어지고 싶어서, 멋모르고 내 몸의 뿌리를 캐던 시절 그러나 지금은 고구마만 보아도 저절로 불어지는 때, 꽃을 깜박 잊고 왔는지 고추잠자리 청년 하나가 호수에 발을 담그다 떠난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이것저것 - 이강산 새벽차를 타려고 귀를 닦는데 귀에서 이..

한줄 詩 2021.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