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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당신께 - 박남준

내 안의 당신께 - 박남준 저문 강에 내린 마음으로 편지의 시작을 썼을 것이다 가슴을 뛰게 하는 연분홍을 숨기지 않겠다고도 했을까 빛나는 풍경의 가장 중심에 당신이 있었으면 그런 꿈을 꾸었지 당신의 눈동자에 사로잡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은 내 고백이었을 것이다 잠든 당신의 얼굴에 미소를 짓고 당신보다 먼저 눈을 떠 향기로운 찻물 올려놓고 싶은 욕심쯤은 부려보고 싶었던 것 내 어리석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다리가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삶의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비로소 눈먼 날들이 나를 여기 이끌었는지 살아 있으니 절합니다 내 안의 당신께 절합니다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걷는사람 절 - 박남준 푸른 바다..

한줄 詩 2021.05.18

푸른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 조하은

푸른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 조하은 어떤 약속이나 희망 없이도 민들레 질경이 엉겅퀴 뒤엉켜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었다 지고 감나무 밤나무 고욤나무 주거니 받거니 저녁 밥상처럼 노을빛 가득 품었다 지루한 애인처럼 버리고 싶었던 오래된 집 마당 귀퉁이 반질반질하던 솥뚜껑 위로 적막이 모여든다 웃자란 아욱 순 뚝뚝 따 잘 익은 된장 풀어 두레밥상에 올려놓으면 몸속까지 따뜻함으로 환했던 시간 파란 철 대문 빛깔 다 사위고 웃음소리 빠져나간 평상 푸른 밥상을 마주하리라는 희망으로 녹슨 대문에 풀색 칠을 입힌다 멀리 예배당 종탑 위로 넘어가던 햇살 미몽처럼 오래도록 걸려 있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민들레의 생존법 - 조하은 아침이 되면 꽃잎을 열고 저녁이 되면 꽃잎을 닫았다 꽃잎 채 열기도 전에 ..

한줄 詩 2021.05.17

폐업 신고 하던 날 - 김선향

폐업 신고 하던 날 - 김선향 수원세무서 앞 일찍 떨어진 은행잎들이 갈피를 못 잡고 폐업 사유를 묻고 무실적이라 답하고 임무는 싱겁게 끝나고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가게가 문을 닫고 개업을 하고 다시 망해 나가떨어지는가 나도 예외는 아니다 작정한 것도 아닌데 네 발길은 하노이에서 온 도티화이네 쌀국숫집에 닿았다 한중일 안마소로 간판이 바뀌었다 마침 안마를 받고 나오던 늙은 남자의 상기된 눈과 마주쳤다 쌀국숫집 대신 한중일 안마소는 문전성시를 이루는 걸까 비가 내려 공치는 날이면 진종일 고향의 음식으로 이를테면 부화 직전의 삶을 달걀을 안주 삼아 향수를 달래던 이주노동자들 그들 토란잎 같은 미소가 생생하다 그때 술 한잔 받을 것을 그 선의를 왜 마다했을까 폐업 신고를 하고 사라진 쌀국숫집 처마에 서서 발치에..

한줄 詩 2021.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