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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 - 윤의섭

물망초 - 윤의섭 제자리에 떠 있는 새는 바람과 맞서는 중이다 다른 항로는 없다 새는 지금 충분히 무겁다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입니다 물망초 우리 일생이 그런 거죠 안 그러면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얘기를 들으면서 한참을 머물렀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나에 대한 기억이 쌓이는 건지 희미해지는 건지 언제부터 이 산책을 나섰는지 떠오르지 않아 깨고 나면 잊힐 게 분명한 생시였다 지난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펼쳐졌으므로 구릉으로부터 바람이 밀려온다 나무들의 지붕이 쓸리고 뒤따라 노을구름과의 꼬리가 흩어진다 걷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이 생이란 지워지지 않은 네 생각들로 가볍지 않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애사 - 윤의섭 내가 꾸는 가장 긴 꿈은 너와의 일초에 대해서일 것이다 ..

한줄 詩 2021.09.18

오늘의 안부 - 김가령

오늘의 안부 - 김가령 전봇대 뒤쪽 얼었던 금 간 벽이 열린다 노릿한 오후가 가만 가만 속살을 드러낸다 몇 개의 본색이 톡 톡톡, 터진다 나를 향해 건너온다 너무 많은 노랑들이 포개져 틈에서 바깥으로 새로 돋은 꽃잎들이 안쪽을 들키고 싶은 마음에 젖는다 벌들이 꽃 뒤로 사라진다 쉿, 이별하지 못하겠다 한겨울에 핀 개나리처럼 추웠던 날이 있었지 오랫동안 싹을 틔우지 못하고 사소한 입술마저 지우고 냉정하게 괜찮은 척, 해야만 했지 누군가에게 수신 거부된 사람처럼 나는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데 단 한 번도 노랑을 배반해본 적 없는 개나리는 확고하다 봄까진 아프지 말라고 떼로 피는 것 같다 오늘부터 안부는 온화하고 간지럼은 부드럽다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문학의전당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

한줄 詩 2021.09.17

매미, 생은 이제 아름다웠다 - 유기택

매미, 생은 이제 아름다웠다 - 유기택 드러눕고 싶은 생이 있다 일곱 해를 기다려, 일곱 날을 울었다 일곱의 전생을 건너와 다 살았다 자그마치 염천 칠월 한길로 칠성판을 깔았다 타인의 낯선 죽음에 쉽게 동의했다 산 자들의 슬픔을 장사 지냈던 것 그럴 리 없는 단발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날아간 쪽으로 적막한 구멍이 하나 길게 생겨났다 고요를 아물린 정적 빙하 속에 갇힌 공기 한 방울 젊은 나이에 죽은 형은 이제 나보다 어리다 벽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이 안 들리는 좀 눕고 싶은 안이 있다 태생이 우발적일 수 없는 총을 오래전부터 손잡이를 아름다운 상아로 장식한 쓸쓸한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싶었다 *시집/ 사는 게 다 시지/ 달아실 야화 - 유기택 새벽 한 시, 옆집 시멘트 담장 아래서 사랑 하나가 끝나..

한줄 詩 202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