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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인간 - 정철훈

회복하는 인간 - 정철훈 새벽 3시, 잠이 안 와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니 누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 같다 거실에 켜진 불이 후광이 되어 인체 비례가 선명하게 보였다 두 팔을 벌린 길이는 신장과 같다, 라는 비례를 통한 인체의 구조는 이 새벽에 두 팔을 벌린 길이는 슬픔의 크기와 같다, 라고 수정되었다 그게 아니면 그 시간에 담배를 빼물고 연기를 내뿜을 리 없다 그게 아니면 나 역시 왜 그 시간에 깨어나 당신을 보는가 캄캄해져야 시야의 회복이 가능하다면 극장에 간 횟수만큼 회복됐어야 했다 불이 꺼지면 회전하는 지구가 보이고 우주에서 날아온 유니버설 로고가 지구를 에워싸는가 싶더니 차르륵, 소리와 함께 필름이 끊겨버린 악몽 뭔가 잘못됐다는 이번 생의 오프닝 크레딧 지..

한줄 詩 2021.12.05

우리를 스쳐간 것, 우리가 스쳐간 것 - 강건늘

우리를 스쳐간 것, 우리가 스쳐간 것 - 강건늘 허연 쌀알 하나 서쪽 하늘에 떠 있는 저녁 한강변을 뛰다 길 한가운데에 멈춰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작은 여치 한 마리 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 낯선 땅 위에 서 있는 낯선 가느다란 초록색 다리 스쳐 지나가는 이 바람은 또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또 어디로 가는가 나는 여치의 생각을 똑같이 따라하고 스쳐 지나가려던 바람도 잠시 머뭇거렸다 며칠 뒤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여치는 짓이겨져 있었다 나비가 날던 곳 아이들이 뛰놀던 곳 여치를 짓누른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시집/ 잠만 자는 방 있습니다/ 달아실 나는 밤마다 별들을 걱정한다 - 강건늘 언제부터인지 나를 부르지도 않고 소식조차 없는 나의 작은 별들 가만히 보니 아물아물 앓고 있다 바들바..

한줄 詩 2021.12.02

별, 아버지의 침상 - 최규환

별, 아버지의 침상 - 최규환 별은 멀고 아득했다 가장 가까운 별이 4광년의 시간을 통과하여 눈에 닿았을 때 나는 그보다 먼 직선의 별을 상상했으나 이미 소멸된 화석이었으니 그리 오래된 일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별이 통과하는 직선과 공간의 새벽에서 흐느적거렸다 고열이 시작되는 온도에 맞춰 빛은 방 안 가득 선명했고 숨을 오랫동안 지켜내고 있었다 별은 직선과 허공에서 수천억 광년을 거슬러 씨앗을 빚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얼룩이 찌든 침상에 누워 천명(天命)을 이룬 돌이 되어갔다 고름을 힘껏 쏟아내고 난 후 시간 밖에서 빛을 다듬었던 것이다 닿을 수 없는 행성 밖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천천히, 그리고 또렷한 화석이 되어 별의 화상(畵像)을 빚어내고 있었다 옥수수 껍질 벗기듯 아버지를 돌아 눕힌 ..

한줄 詩 2021.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