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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폭산장 바람 소리 - 김기섭

양폭산장 바람 소리 - 김기섭 물빛 고운 비선대를 떠나 천불(千佛)이 거처한다는 천불동으로 접어들었다. 귀면암을 지나 양폭산장에 도착할 무렵 대청에 낙엽이 다 졌다는 풍문이 들려왔고, 산장 앞 단풍잎들은 눈물겹게 빛났다. 만경대 꼭대기, 새벽부터 비가 뿌렸다. 공친 산행, 어두운 산방에 일없이 둘러앉아 소슬바람에 삐걱거리던 문소리와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면서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낮이 되면서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정현 형이 가수 장사익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별처럼 슬픈 찔레꽃 향기는 골짜기를 떠돌다가 가을비에 젖어 들고 밤새 바람이 세찼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밖을 나서는데 그새 가을이 다 갔는지 지천으로 깔린 붉은 잎을 차마 밟기 어려웠다. *시집/ 달빛 등반/ 솔출판사 꿈꾸는 수렴동 ..

한줄 詩 2022.02.23

덫 - 최백규

덫 - 최백규 밤새 덫에 뭉개져 있던 쥐를 끄집어낸다 손끝에 밴 피비린내가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도 죽은 대낮에 커튼을 젖히다 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암세포만 몸속에서 꾸준히 자라고 있다 빨래를 하고 밥을 차린다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두렵지 않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평생 하청 업체에서 일했다 자존심을 죽이지 못해 늘 순탄치 못했다 용접 불꽃과 부딪치며 살아온 그들은 잘못 접합된 쇠처럼 어긋나 있었다 이제는 잘린 손가락이 약속을 쉽게 꺾어버릴 것 같다던 농담마저 우스워진다 팔에 새긴 이름을 긁적일 때마다 몸에서 고기 타는 냄새가 난다 욕실에서 혼자 등을 밀다 문득 이 계절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거리 나무들도 병을 앓아 꽃에서 고름을 흘릴 것이다 피 흐르는 손목을 쥔 채 덫처럼 아무..

한줄 詩 2022.02.22

불운의 달인 - 이현승

불운의 달인 - 이현승 나는 무례한 사람들의 특징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움이 많고 사무적이며 세상에는 뭔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 어떤 급한 일도 덜 중요한 일로 만드는 능력을 신은 왜 그들에게 주었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늑장 피우지 않지만 서두르지도 않는데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월이 짧은 것이 달력 기술자의 문제가 아니듯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해가 빨리 가는 것도 아니며 슬슬 얼굴색이 삭힌 홍어처럼 되어가는 사람 앞에서라면 그들은 한 호흡으로 더 멀리 잠수하는 사람처럼 굴지만 다음 기회란 항상 꽝 뒤에 오는 것이라서 운 나쁜 사람은 철로에서 튄 돌멩이에 눈을 맞은 사람이며 벼랑 말고는 다음이 없어 참기 힘든 사람이다. 우리는 성공이 약속한 대로 찾아오지는 않..

한줄 詩 2022.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