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탈 - 김수우

마루안 2022. 1. 28. 21:50

 

 

비탈 - 김수우

 

 

미끄럽다 찢어진다

평지에 서보지 못한 발목들이 엎어진다

 

내가 버린 쓰레기들이 수평선을 넘어간다 동서남북에 산불이다 몇달씩 타오른다 미얀마 청년들은 암흑과 싸우는 중이다 피가 터진다 거북이 배 속에 구겨진 패트병이 가득하다 빙하가 허물어진다 폭우와 폭염과 돌풍과 가뭄, 저 순서가 없는 불화들 고압선마다 걸린 무수한 갈고랑이들

 

창문을 깨뜨리던 무수한 돋보기 현미경들

우리 안의 가파른 사선은 읽지 못했다

 

짐승의 내장을 닮은 천민 자본은 비탈을 오르려 발악이다

평민 희망은 비탈을 잡고 바동거린다

원래 비탈이었던 가난은 잘 미끄러진다 물길을 낸다 흔쾌하다 하루가 된다

 

허공에 놓인 저 사다리

한참 더 내려가야 한다

 

궤도가 멈추는데

어떤 수태를 기억하는가 야생 쑥 무더기로 쏟아지는 봄,

봄이 미끄러진다

새벽달이 미끄러진다

 

 

*시집/ 뿌리주의자/ 창비

 

 

 

 

 

 

공범 - 김수우

 

 

개똥밭은 언제나 확실했고 바다는 매일 흔들의자였네

모든 거역에는 속도가 있지 몰래 꽃을 피우는 건 불공평하지 않나

 

바람의 기침은 오늘도 불안하네 문밖엔 늘 늙은 민들레뿐이라

내 손엔 없지만 내 그림자가 든 칼은 참 예리하구나

 

모든 살인과 이 땅의 분단에 나는 책임이 있네

웃음과 축배도 책임져야 하지 스위치만 켜면 불이 들어오는 소돔성

 

누가 알았겠나 신이 치매에 걸릴 줄, 저리 앙상한 몰골일 줄, 이빨도 없고 귀도 멀고, 착각도 변덕도 심할 줄, 마른 고구마처럼 고집만 뻣뻣한 줄, 정말 마른 고구마가 될 줄, 비겁한 나는 비겁한 지옥을 닮아가네

 

두려워 말게

우리가 창조한 인공지능이 문법과 윤리를 지켜줄지 몰라

 

그래도 쿵, 쿵, 쿵

저 고가도로 밑에서 울리는 새의 심장

 

 

 

 

 

*시인의 말

발원지를 기억할 수 있을까.
녹슨 칼로 새긴 목판의 오래된 글씨처럼
어줍은 이상주의자.
등뼈를 곧추세우려던 공룡 같은 날들, 모두 혁명을 소비했을 뿐.
두개골 뒤통수에서 돋는 실뿌리가 저릿저릿하다.

창틀 위로 차오르는 방울벌레의 울음은
몇번의 허물을 벗었을까.

파이고 파인 서사들이 부스름투성이이지만
도둑질한 꿈도 언어도 부유하는 비닐처럼 떠돌지만
뿌리는 안다.
이상이 현실을 바꾼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세계를 업고 있다는 것을.
바람의 대합실에 저녁불이 들어온다.

미얀마의 눈물은 나의 제국주의 때문이다.
한발 내디딜 땅도 바닥도
내가 버린 쓰레기로 가득하다.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