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 년 여관 - 박주하

마루안 2021. 11. 5. 22:35

 

 

백 년 여관 - 박주하

 

 

백 년 닳은 문턱에

노란 은행잎 한 장이 내려와 묻는다

잘 지내니?

별빛 돋았던 흔적도 낭랑하게 첨부한

뒷심 깊은 안부를 받으니

침묵에도 한계가 온다

우연을 꺾고 싶은 결심마저 도진다

하지만 어긋난 폐허를 더듬어서 어쩌겠는가

잘 지내지는 못했으나 이젠

무엇이 그리 잘 사는 것인지 답할 일도 아니어서

그저 간절히 묵었던 무덤 같은 방에 들어

백 년 전에 넘어진 구름의 까닭이나 탐한다

늦가을을 풀어

더는 익지 않는 모과 한 알의 사정을

창에 어리는 물방울에 찍어 벽에 기록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전부,

다만 침묵의 충만함을 뭉쳐서

백 년 후에 다시 찾아들 그림자를

무심히 닦아 허공에 걸어 둘 뿐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심심한 날 - 박주하

 

 

감나무 한 그루가 유일한 재산인

가난한 옛집 마당에

 

장대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이는

이제 죽은 남자가 되었지

 

바람이 불어와 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바람에 흔들리며 때로 눈물을 닦았겠지

 

지나간 기척들은 이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마당 끝 어딘가에 묻어 두었을 차가운 하루를

내색 없이 생각하다가

 

아무도 살지 않는 집터에서

머리만 보이는 사진을 찍었다

 

바람이 불거나

눈발이 날리거나

나뭇잎이 흔들리면

내가 간 줄 알라던 숱한 인사들

 

몸이 없어 전하려던

나중의 안부라는 걸 알겠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얼룩처럼 번지는 어스름을 붙잡고

그리운 얼굴들이 가득 들어서는 마당

 

감나무는 알되 감은 모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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