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죽는 것도 개운할 때 - 이성배

마루안 2021. 10. 28. 22:33

 

 

죽는 것도 개운할 때 - 이성배

 

 

들깨 송이가 까맣게 익는 사이

산도 사람도 까슬까슬해졌다.

 

풋내 나던 봄과 뜨거웠던 여름은

뒤란 항아리 속에서 더디게 익는 중이고

 

잘 말린 고추는 자식들 수만큼 나누어 놓았고

늙은 호박은 나눠줄 식구들보다 넉넉하다.

 

농사는 모자란 것도 남는 것도 없지만

다행히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골목에서 마주친 노인들은 서로 자기 집으로 저녁 가자며 소매를 잡는다.

 

그만하면,

이만하면 되었지 뭐.

 

이맘때는

죽는 것도 개운하다.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고두미

 

 

 

 

 

 

소일거리 - 이성배

 

 

회관 앞 평상에 마을 노인들 나와 있다.

며칠 전부터 슬몃슬몃 다음 계절이 비치던 자리

 

진한 자줏빛 꽃잎 여러 폭 두른 목단꽃

새초롬하니 노르스름한 애기똥풀꽃

아직도 서럽고 서러운 꽃며느리밥풀

 

지팡이는 비스듬히 기대 놓고

꽃들은 아직 털신을 신고 있다.

 

꽃잎은 진작에 졌을지라도

까맣게 염색한 꽃술은 야무지게 뽀글뽀글하다.

 

계절을 살피는 일은 생각보다 고된 일

 

점심 먹으라는 소리에

뒤도 안 보고 일어나 종종종

 

깜박 잊은 지팡이가

잠시 빈 평상을 지키며

다음 계절을 마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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