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도 개운할 때 - 이성배
들깨 송이가 까맣게 익는 사이
산도 사람도 까슬까슬해졌다.
풋내 나던 봄과 뜨거웠던 여름은
뒤란 항아리 속에서 더디게 익는 중이고
잘 말린 고추는 자식들 수만큼 나누어 놓았고
늙은 호박은 나눠줄 식구들보다 넉넉하다.
농사는 모자란 것도 남는 것도 없지만
다행히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골목에서 마주친 노인들은 서로 자기 집으로 저녁 가자며 소매를 잡는다.
그만하면,
이만하면 되었지 뭐.
이맘때는
죽는 것도 개운하다.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고두미
소일거리 - 이성배
회관 앞 평상에 마을 노인들 나와 있다.
며칠 전부터 슬몃슬몃 다음 계절이 비치던 자리
진한 자줏빛 꽃잎 여러 폭 두른 목단꽃
새초롬하니 노르스름한 애기똥풀꽃
아직도 서럽고 서러운 꽃며느리밥풀
지팡이는 비스듬히 기대 놓고
꽃들은 아직 털신을 신고 있다.
꽃잎은 진작에 졌을지라도
까맣게 염색한 꽃술은 야무지게 뽀글뽀글하다.
계절을 살피는 일은 생각보다 고된 일
점심 먹으라는 소리에
뒤도 안 보고 일어나 종종종
깜박 잊은 지팡이가
잠시 빈 평상을 지키며
다음 계절을 마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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