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 김윤환
노을을 슬퍼하는 진짜 이유는
잔광(殘光)이 동굴을 향해 들어가는
어린아이의 눈동자처럼 보였기 때문이야
맑고 푸른 아침을
내 것처럼 으스대지 말 걸 그랬어
오후가 가까울수록 쓸쓸한 시간
꽃은 지고 향기도 말라
아무 것도 건져 올 수 없는
이승의 벌판
꽃술에 취해
반복되는 노을이
마침내 동굴에 자리를 편다
산 채로 불붙어가는
흰 나방의 꿈
하늘의 별이 아니라
어둠의 별이 되고 싶었지
동굴의 눈(眼)이 되고 싶었지
마치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이석증(耳石症) - 김윤환
뿌리 없는 돌 하나
귀청에 들어와
발걸음 뗄 때마다
세상을 흔드는데
아침 새소리나
나비의 날갯소리를
듣고자 했던
고요는 사라지고
막혀버린 출구
분주한 고함소리에
귀먹고 눈멀었지
반백 년 지나서야
죽은 돌 하나
치우고 싶었네
어지러움 걷어내고
빈 고막에
따뜻한 돌 하나
들이고 싶네
공명(共鳴)한
산돌 하나
내 안에 옮기고 싶네
*시인의 말
티끌만큼이나 가볍고
별만큼이나 아득한 기억을 붙잡고
매달리다가 마침내 그 풍경을
지우기 위해 시를 써왔다
점점 사라지는 어머니를 붙들고
주저앉아 우는 아이
시는 숨어서 울 수 있는 골목
나는 지금 다섯 살에 도착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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