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굳은살 - 한관식

마루안 2020. 5. 6. 19:15



굳은살 - 한관식



前生의

강나루 앞에서 깊은 다짐을 했다 질긴 인연 얽히지 않으려고

주억주억 울어대는 뱃머리에서

다시 한 번 인연 설키지 않으려고, 내 이름을 방생하며

現生 길에 올랐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연이라

부딪히면 현생의 인연이라

옷깃을 스쳤던 바람을 거두어 들여도

몸을 낮추어 엷은 소망으로 기울어져도


그대였던가

그대, 이렇게 관련지어도 되는가

항시 내안은 뜨겁고

항시 나는 열려있고 아우성 아우성

그대를 향한 간절한 외침

여백이 보일 때마다 숨 가쁘게 채워지는

그대라는 머무름 혹은 긴 여정


내 영혼은 어느 곳으로 흘러가고 있을까

창틀에 햇볕이 조롱조롱 열리면

아침이여 당도했다고 엽서 띄어줄래?

떠날 것을 염려하여

그대 안에 나를 보관했는데

속속들이 상처로 기웃거리며 산다

전생으로 이어진 웅크린 자국



*시집, 비껴가는 역에서, 도서출판 미루나무








겸손한 고독 - 한관식



고독이 운다 슬그머니 찾아와 평온을 가장한 눈물이 떨어진다 옥상을 통하는 첫째 계단에서 이음새가 낡은 풍향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저토록 한을 숨긴 바람을 하늘이 덮는다 저녁은 한 칸씩 어두워지고 빈 방과도 같은 세상은 노점의 행렬처럼 여전히 뿌리박지 못한 채 외곽으로 떠돌며 비는 내리고 꽃밭에는 꽃들이 차례를 기다린다


그림자를 좇는 한 때의 마음이 모였다 원을 그리며 여름이 선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한다 누군가에게 편집된 내 꿈은 멀어지고 가난과 이별하기 위해 욕망의 은밀한 부위를 건드렸다 옥상에 다다르자 멋없이 담쟁이 넝쿨 위로 민들레 홑씨가 나풀댄다 지나간 시간은 추억을 두고 갔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나만 두고 갔다 정말로 알지 못하는 인생의 귀퉁이에 내몰려 늘 불편하게 만든다


고독이 운다 살다 보면 닮고 싶은 누군가를 만난다 농담을 던지면 가지런한 이빨을 보이며 질긴 인연 속에 붉고 발랄한 밤을 꿈꾼다 절망을 견디기 위해 어깨동무를 한다 옥상 아래 비춰진 잔영에는 내 그림자가 얹어져 있다 언젠가 인기척이 없을 옥상은 세상과 가깝다 너에게 맡긴 마음을 이제 돌려받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철새 무리가 하늘과 관통하는, 뜻밖에 오후는 질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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