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손택수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 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고 있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신록의 말 - 손택수
절경 앞에서 절망한다
뭐라 이를 수가 없다
마치 말을 익히기 전의 아기처럼
첫 모음과 자음을 궁리 중이다
궁리 중이기만 하다
가르치는 아이 하나는 왜 지각을 했느냐는 힐책에
주말 사이 온 도시가 신록으로 물들어버려서
길을 잃고 말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왜 그리 쉽게 야단을 쳤을까
맹랑한 봄의 새 독도법을 윽박질렀을까
따분한 건 나의 노래였나 보다
함부로 부른 노래 속에 잃어버린 풍경들이었나 보다
해마다 봄이면 몸져눕는 어머니처럼.
반백년 전의 산통을 되새김
되새김질 하며 돋아나는 저 신록 속에 저릿한
무엇인가 있구나 차라리 아기처럼
뭐라 말은 못해도 두 눈이 빛나는
아기처럼만 있었어도 좋았을 것을
잃어버린 절경이여
돌아가자 시무룩해진 봄에게로
뭐라 할 수 없는 신록의 말들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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