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 김경미

마루안 2018. 7. 10. 19:49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 김경미



낯선 읍내를 찾아간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포플러나무가 떠밀고
시외버스가 부추기는 일이다


읍내 우체국 옆 철물점의 싸리비와
고무호스를 사고 싶다
청춘의 그 방과 마당을 다시 청소하고 싶다
리어카 위 잔뜩 쌓인 붉은 생고기들
그 피가 옆집 화원의 장미꽃을 피운다고
청춘에게 배웠던 관계들
언제나 들어오지 마시오 써 있던 풀밭들
늘 지나치던 보석상 주인은 두 다리가 없었다
머리 위 구름에서는 언제나 푸성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계를 차도 시간이 가지 않던
시간이 오지 않던
하늘에 1년 내내 뜯어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건
좌절과 실패라는 것도 청춘의 짓이었다


구름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고개가 부러졌던 스물셋
설욕도 못한 스물여섯 살의 9월
새벽 기차에서 내리면 늘 바닷속이었던
하루에 소매치기를 세 번도 당했던
일주일 전 함께 갔던 교외 찻집에 각각
새로운 연인과 동행했던 것도
어색하게 인사하거나 외면했던 것도 언제나
청춘이 시킨 짓이었다


서른한 살에도 서른여섯 살에도
계속 청춘이라고 청춘이 계속 시키며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다 청춘의 짓이다
어느덧 불 꺼진 낯선 읍내
밤의 양품점 앞에서
불 꺼진 진열장 속 어둠 속 마네킹을 구경하다가
검은 마네킹들에게 도리어 구경당하는 것도
낯선 읍내 심야 터미널 시외버스도
술 취해 옆 건물 계단에 앉아 우는 남학생도
떨어져 흔들리는 공중전화 수화기도
다 청춘이 불러낸 짓이다


그 수화기 떨어지며 내 청춘 끝났다 절규하던 목소리도
그 전화 아직 끊기지 않았다는 것도
지금이라도 얼른 받아보라고
지금도 시키는 것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아직도 시킨다고 따라나서는 것도
아직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라고 믿는 청춘이
있다는 것도 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시집, 밤의 입국 심사, 문학과지성








연애의 횟수 - 김경미



그 나라 입국할 때는 기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밤의 횟수를


가령 검은 눈물 자국
베개를 지나
침대 밑으로 죽은 팔처럼 길게 흘러내린 밤


그렇게 죽음의 태도를 지녔던 첫 결별의 밤
스물한 살의 봄이었는지
열일곱 살의 책가방 든 가을 고궁이었는지


서른다섯 살까지는 몇 번의 태도가 있었는지


가장 최근에는 누구였는지


온 생애 단 한 번의 태도도 없었던
불행한 자를 제외한 누구나


실연의 피격(被擊)과 가격(加擊)의 횟수를
실명과 주소까지 낱낱이 기입해야


골목의 모양과 부피가 다른
지도를 허락하는


밤의 입국심사서를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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