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녁은 - 김이하
가을 이 저녁은
나도 무슨 색으로 물들고 싶다
저기 저 들의 사람들
이제는 표정 없이 허수아비 되어
가슴 툭 터진 방천, 말뚝이 되어
불콰한 햇살과 한잔하고
햇살 들다 지나간 지 한참인 마루에
바람에 들다날다 오갈 데 없는 낙엽처럼
쓰러진다, 가을 이 저녁은
더 이상 두드릴 콩동도 없이
더 이상 까발릴 흥부네 박덩이 같은 것도 없이
너무도 심심하고, 무료하고, 삶은 추워서
뜨거운 눈물로도 얼굴 데워 보지만
꽃 피고, 잎 푸르다 먼 산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물들어 버리는
나무 한 그루의 빛도 닮지 못하고
저 들의 빛까지도 잃어버리고
그만 어둠에 휩싸이고 마는데
가을 이 저녁은
나도 그만 어둠에 묻혀
늦은 군불에 도깨비처럼 타는 불빛
그 따숩고 아련한 빛이면 좋겠다
*시집, <춘정, 火>, 바보새
목련 아래서 봄을 기다린다 - 김이하
어느덧 내가 가을이다
순백으로 빛나던 봄은 오래 전
찰나에 가버리고
흐물흐물해진 몸을 끌고
힘겹게 여름을 건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노오란 감이나
붉디붉은 대추알 같은 씨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누구도, 아무도 우러러주지 않는
이 가을
명꽃 같은 구름 입에 물고
눈 찡그리면
어느 새 목련 나무 아래 닿구나
그러면 어느덧 나는 가을이구나
누렁누렁 변해가는 잎들
목이 으쓱한데, 아니다
구름으로 비단을 짜는 눈부신 손
봄을 준비하는 게 아니냐!
오면 그뿐인 봄을,
# 김이하 시인은 1959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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