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로소 개 - 강시현

마루안 2022. 8. 20. 21:27

 

 

비로소 개 - 강시현

 

 

말로만 듣던 깍쟁이가 따로 없었다

아내의 벗이 여행 간 사이 며칠 맡아 달라고 보낸 그 녀석에게는

싱그럽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사람보다 더 비싼 이발을 하고 예방접종을 받고

더 자주 목욕하고 붙임성도 있다니

말쑥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은근히 경계심도 돋았다

몰티즈니 푸들이니 치와와니 하는

억세게 운 좋은 견공들은

고상하게 먹고 자고 똥 싸고 산단다

 

검둥이는 그늘이 흘러내리는 슬레이트 처마 밑에서

컹컹 짖으며

사람 똥도 먹고

마을 어귀에서 흘레도 붙다가

한여름 개장수에게 다리가 꺾인 채로 팔려 나갔다

그 돈으로 육성회비를 내고 공책도 샀다

검둥이는 문풍지처럼 떨며 가부좌를 틀고 떠났다

그 후로 습관성 탈골처럼

어떻게든 꺾인 활자를 읽으면 나는 몹시 아팠다

 

땀에 전 몸뚱아리와

생존에 밀려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억세게 버티는 구체적인 내 두 앞발,

팔려 가지 않으려 필사적이던 검둥이를 닮았다

 

어둠의 흔적은 명료해서 멀리 자작나무 숲 위로

검둥이 다리처럼 잘못 꺾인 달빛이 밤새워 제 몸을 흘리고 있다

 

 

*시집/ 대서 즈음/ 천년의시작

 

 

 

 

 

 

시간의 길 - 강시현

 

 

더위가 시들면서

작은 연못의 수면은 추돌한 용달차 앞 유리처럼 부서졌다

 

지운 발자국의 머리맡으로 무수한 발자국이 따라오는 시간의 어스름

가까운 들판은 기다림을 키운 능선 따라 비척대며 저물어 갔다

 

애써 품지 않아도 튼튼하게 자라는 것은

시간이라는 무봉(無縫)의 뿔

어두운 길 위에도

만질 수 없이 투명하게 쓰고 맞이하는

시간의 주렴이 늘어졌다

 

푸른 날이 서지 않는 시간의 칼을 차고

불안의 운명과 성급히 결혼한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

 

일생은 시간의 길에 깃들어 사는데,

흔들리며 이 길을 다 걷고 나면

불인(不仁)의 하늘이 무심히 팔짱을 끼고

오래오래 또 나의 시간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인데,

어쩐다?

 

혼자 걸으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 삶의 서툰 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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