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방향이 다를 뿐 - 이윤승

마루안 2022. 8. 20. 21:45

 

 

방향이 다를 뿐 - 이윤승

 

 

오래 씹을수록 좋다고 한다

좋은 침을 만들기 위해선 잘 씹어야 한다

씹지 않으면 이빨의 기능이 약화될 수도 있으니까

 

바람 불어와 나뭇잎 흔들린다

하고 싶은 말 꼭 해야 하는

친절한 당신 옆에서 흔들린다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려서

소처럼 되새김할 수 있는 네 개의 위장이 없어서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책을 보고 있다

 

씹을수록 건강해진다는 너머로 걸어간다

너머가 알 수 없어질 때마다

시작이 반이면 반은 읽은 것이라고

커피가 달지 않고 적당히 맛있다고 감정 빼고 말한다

 

뱉어내는 타액이 약이 될 때도 있지만

독이 되기 십상이어서

제대로 알고 적당히 씹어야 하고

씹을 걸 제대로 씹어야 한다

 

친절하던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틀고

흰 구름이 안면에 홍조를 띠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작은 발걸음을 떼며

오른쪽 방향으로 걸어간다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 문학의전당

 

 

 

 

 

 

행운동 - 이윤승


달동네 봉천동 살 때
연탄 오십 장 들여놓으면 그저 오지고 마음 든든하던 때
동그라미 친 달력 월급 날짜를 몇 번이나 쳐다보는데
연탄 똑 떨어지고
허옇게 탄 몸뚱이 가루가 되도록 살아내는
아버지 같은, 연탄 한 장 새끼줄에 꿰어 들고 오르던
신혼 시절 봉천동 언덕길

가파른 긴 언덕길 행운처럼 늙어 갔고 
지친 발걸음으로 살아낸
지금은 행운동이라 부르는 봉천동

 

 

 

 

*시인의 말

나도 모르는 곳에 나를 놓아두고

지구를 몇 바퀴이나 돌았다.

서면 보이지 않고

앉으면 비로소 보이던

젖은 풀잎의 행간을 지나온 바람, 다시 돌아보니

다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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