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호박꽃 피던 날 - 황현중

마루안 2022. 8. 18. 21:18

 

 

호박꽃 피던 날 - 황현중

 

 

호박꽃 속 꿀벌 쌈 싸듯 잡아서

홰홰 팔 내두르며

삼심풀이 오후가 기울던 해거름

서울 갔던 아버지가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날 보고 웃던 날

아부지, 아부지·····

오냐, 내 새끼·····

흠흠 서울 냄새 맡으며

주렁주렁 애호박처럼 매달리며

한 마리 서러운 꿀벌이 되어

어린 새끼는 잉잉 울고

호박꽃 속 꿀벌 쌈 싸듯

아버지가 날 안고 홰홰 팔 내두르면

어느새 내 슬픔은 기쁨으로 활짝

울 아부지 왔다!

이것 봐라, 울 아버지 서울서 왔다!

동네방네 자랑에 호박꽃은 넝쿨지고

아버지는 새 구두에 뒷짐 진 채

아직 오지 않은

생선 장수 어머니를 마중 나가시고

 

 

*시집/ 구석이 좋을 때/ 한국문연

 

 

 

 

 

 

아버지 냄새 - 황현중


나는 뒤끝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뒷간에 일 보러 갔다가 향기로운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고 나오지만, 향기로운 그 냄새의 끝에서 슬쩍 잡히는 뒷간 냄새를 나는 용케 알아차리고는 그를 미워하게 되는 것인데, 그의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뒷간 냄새를 감쪽같이 감춘 간교한 뒤끝의 향기를 미워하는 거야


아버지는 똥 친 손을 바지 가랑이에 쓱쓱 문지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진짓상을 받으셨지 그래도 아버지 냄새는 향기로웠어 무말랭이 같은 아버지였으니까 무와 햇볕이 전부인 무말랭이에 무슨 뒤끝이, 감출 죄가 있었을까 아버지에게 죄가 있었다면 뼈 빠지게 일했던 것뿐이지 무말랭이같이, 무말랭이같이 바싹 마른 아버지의 몸에서는 땅에 엎드린 겸손한 흙내와 햇살에 부지런히 달군 성실한 냄새가 물씬거렸지 글이나 말로써는 닿은 수 없는, 막된장 냄새 깊고 아득한 땅심과 나를 눈 틔우고 무성하게 자라게 했지 빈 가슴 빈 머리 가득 채웠지 

 

천박한 향수로 죄를 감추고 사는 얼간이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죄 없는 아버지 냄새 그리운 똥 냄새, 그랬던 거야, 눈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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