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희다 - 강문숙
여름에 내리는 비는 희다, 아프다
발등 찍힌 채 칭칭, 하얀 붕대를 감고 절룩이며 걷다가
홀연히 돌아보면 온통 진창이다
몇 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이들이 사라졌다
다시 기억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단애의 시간들
흰 그늘의 슬픔이 짙어진 오후 세 시쯤
쏟아지는 눈물 속으로 내 뼈는 하얗게 부서지고
하늘은 한쪽으로 희뿌연 빗살을 뿌리며 기울어질 듯하다가
우레를 숨긴 채, 곧 제자리에서 눈꺼풀만 겨우 닫는다
누군가 입을 열어 말을 붙인다면 줄줄 흰색으로 흘러나와
순식간에 나를 에워쌀 것 같은 저 빗줄기의 감옥
나는 기꺼이 최선을 다해 미쳐 갈 것이다
그 흰빛에 갇혀 종일 반복 재생하는 음악처럼
칠월 장맛비는 마디가 없다, 길다
*시집/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천년의시작
꽃의 슬하 - 강문숙
오롯한 날들 홀로 정 없이 흘러갔다고 말하진 않겠다
내 곁을 떠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다는 아니었을 터
웬만해선 곁은 내주지 않는 외골수의 제 천성도 없지 않았으니
누구 탓이라는 말도 오늘은 않겠다
마음에 얹혔던 몸 기어이 아파 한참을 집 비운 사이
탁자 위 난 꽃대의 슬하에 맑은 이슬 맺혔다
지문 닳은 내 손가락은 너무 뭉툭해
오랫동안 입속에서 고요하던 혀끝을 내밀어 대어 본다
아 무미한 저항의 이 맛, 꽃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기에
너는 너무 힘든 길을 홀로 걸어왔구나
갸륵한 이마를 가진 것들의 안간힘이 찌르르, 혀끝을 잘라 먹는다
서둘러 날 저물고 무너지는 것들이 입속으로 다 들어온다
사람이여, 네가 가는 길 위에 웬 모래가 이리 많은가*
*강은교의 시 <황혼곡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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