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알래스카 개구리 - 류시화

마루안 2022. 6. 16. 21:23

 

 

알래스카 개구리 - 류시화


알래스카의 숲 개구리는
무슨 이유로 그곳에 살게 되었는지
개구리 자신도 알지 못하고
원주민들도 잘 모르지만,
달이 여섯 번 차고 기우는 긴 겨울 동안
몸이 완전히 언 상태로 변한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 속에서
호흡이 정지하고
심장 박동이 멈추고
혈액 순환도 중지된다
뇌가 활동을 중단해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초록색 얼음 덩어리가 되어
기다리다가 마침내 봄이 오면
몇 분 안에 온몸이 해빙되고
폐와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와
가까운 연못에서 다시 삶을 시작한다
그 빙결의 시간 동안
심장 세포만큼은 살아 있어
날이 따뜻해지면 언제든 부활이 가능하다
얼어 죽는 것이 아니라
얼어서 살기로 결심한 개구리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외딴 별에 와서
온 존재가 얼어붙어도
온 존재로 심장 세포를 살아 있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지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너는 피었다 - 류시화


봄맞이꽃, 너는 피었다
언제 피어야 하는지 대지에게 묻지 않았다
너를 창조한 이의 수신호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피어나기에 최적의 장소인지
피는 것 도와줄 이가 있는지 살피지 않았다
눈 다 녹았는지
비소식 언제 잡혀 있는지
자꾸만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야생동물 발자국 옆에서
그냥 피었다

어느 만큼 높이 자라야 흔들리지 않는지
속눈썹이 길어야만 하는지
어느 쪽으로 얼굴 향해야 하는지
오래 계산하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길 것인지
다른 꽃들의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다

지난번 생이 얼마나 가파른 생이었나
얼마나 고된 노동이었나
입술 깨물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봄 사용법 외우지 않았다

너는 꽃이면서
너 자신의 유일한 지지대
날개이면서
그 날개 밀어 올리는 바람

너는 피었다
그냥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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