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월 바람 - 한명희

마루안 2022. 6. 11. 22:05

 

 

유월 바람 - 한명희

 

 

잎에 가려

꽃 같지도 않게 피어 있던 감꽃

내린 비에 떨어져

떠날 것은 떠나고 남을 것만 남았다

 

처마 끝에 달린 달과

어둔 밤을 함께한 별들도

떠날 것은 떠나고 남을 것만 남아서

현충일도 지난 새벽까지 남아서

 

이렇게 반짝이고 있듯이 별을 닮은 감꽃도

견뎌서 살아남은 힘으로

이 해가 가기 전에 저만의 별을 키워

달콤하고 투명하게

모나지 않게 단단하게

세상에 내놓을 것이니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인파에 가려 채 피다 말다 시든 나는

어느 별을 보고

어떤 감꽃에 매달려 천둥 치는 비바람과

서슬 푸른 밤을 새야

땡감 같은 자식들 단단하되 떫지 않은

단감 되어 울 밖에 내놓을 수 있을까

 

밤비 물러가듯

떠날 때 떠나서 맑고 투명하게

잊을 때 잊혀서

저 별들처럼 하늘에서 빛날 수 있을까

떠내려간 감꽃처럼

강으로 흐를 수나 있을까

 

감나무 감아 도는 유월 바람

새벽부터 선뜩하다

 

 

*시집/ 아껴 둔 잠 / 천년의시작

 

 

 

 

 

 

워커홀릭 - 한명희

 

 

비가 어둠의 끈을 잡고 줄줄이 내려오는 밤

 

젖은 침대를 등에 지고 살던 우리는 흘러넘칠까

적금 붓듯 늘어나던 분노도 땀과 같이 조금은 지체됐던가!

 

창문에 붙들린 빗방울처럼 불안한 눈빛 속에 오고 가던 술병과

나비춤을 추던 입은 접어 햇볕에 웃던 꽃들 뒤에 놓고

 

동창회인가 어느 호텔에 있는 결혼식 하객으로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침과 욕설로 오염된 우리는

구린내가 가시지 않는 변기 같은 세상

 

밤새 찍찍거리던 쥐들의 눈을 달고

생쥐 같은 새끼들과 찰방찰방 뛰어놀지도 않았을까?

 

분리수거함이 있는 화장실에서 새 아침이 오기 전에

지고 있던 침대를 벗어 놓고

 

세탁은 못 할망정 분리수거함에라도 들어 있었어야 할 우리는

언제부턴가 사라진 웃음을 찾으러 은행 문을 드나들고

 

나이 들어 걷지도 못하는 사람의 휠체어가 되어

요양원을 찾기도 했던가! 모처럼 쉬는 날 새벽같이 일어나

 

줄줄이 연체되지 않는 빗속을 거닐다

흙탕물이 튄 옷을 입고

 

누구도 감당할 수 없게 젖은 침대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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